Diary/공연관람 기록

[221113] 연극 '아트'

eunryeong 2022. 11. 17. 15:20

- 2020년 백암아트홀에서 관람 이후 이번이 두번째 관람. 지난번에 보았을 때에는 마크를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본 아트는 마크가 어느정도 이해가 되더라. 세르주는 여전히 얄밉지만 이해는 가는 캐릭터고, 이번에도 이반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불쌍해. 그치만 이반이 있어서 이 셋의 우정이 유지되는 거겠지 아마도?

 

- 이번에 캐스팅에서 원로배우들이 이 극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꼭 봐야지! 생각해서 일정을 겨우 맞춰서 보러왔다. 우연히 앞쪽 자리가 남아있는 날을 발견해서 바로 예매! E열이었는데 단차도 좋고 무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적당한 거리라서 편하게 관람했다. 다만 아무래도 배우분들 나이가 있으셔서인지 연극 중간중간 목소리가 좀 작게 들리는 부분들이 있어서, 꽤 앞쪽 자리였음에도 관람하기 아주 편하지는 않았다.

 

- 순재마크는 이전에 보았던 젊은 마크보다 좀 더 나이에 걸맞는 꼰대스러움과 꼬장꼬장함을 가지고 왔는데, 그래서 오히려 마크에 이입하기 좀 쉬웠던 것 같다. 30대는 현대미술을 이해 못하는게 자랑이 아니지만(전적으로 제 편협한 의견입니다) 60대가 넘어서는 현대미술 이해 못해도 뭐 어때. 아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게 쉽지 않은 나이이긴 하니까. 거기다가 마크가 마지막에 친구를 빼앗기는것 같았다고 하는 장면에서, 4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한 친구를 다른 무언가에 뺏긴다는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일지 많이 와닿았던 것 같다.

 

- 주현세르주 개인적으로 너무 이 역 잘 맡으신것 같음 ㅋㅋㅋ 물론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같은 코믹연기도 소화하시지만, 아무래도 노주현 배우를 보면 젠체하는 도시의 중년 남성이 먼저 떠오르는데 누가 봐도 세르주 그 자체! "세네카를 읽어, 상당히 모던해"라고 이야기하는걸 들으면 나도 모던해지기 위해 세네카를 읽어야만 할 것 같다.

 

- 일섭이반 정말 극강의 귀여움! 힐링캐! 처음 등장할때 객석을 등진 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뒷걸음질로 나타나는데 ㅋㅋㅋ 진짜 마크랑 세르주 너네 이렇게 착한 이반을 괴롭히면 안되지! 생각하게 만드는 귀여운 이반이다. 나이대에 맞춰서 이반의 결혼이 재혼으로 수정되었는데, 양가 부모님을 모신다고 해서 아... 정정하게 잘 계신가요...?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흰색 판때기 가격이 2020년에는 3억이었는데 2022년에는 5억이 되었다...! 환율상승을 반영한 가격인가??? 아니 근데 앙뜨르와 무대에서 우당탕탕 굴렀어ㅠ 5억짜리 판떼기가 굴렀지만 쿨한 우리 마크와 세르주... 안찢어졌으면 되었다길래 오 대인배시구나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보니 정말 앙뜨르와 그깟거 없어도 잘 사실 분 같긴 해.

 

- 무대 중앙과 왼쪽, 오른쪽에 3개의 그림이 놓여있는데, 어느 그림에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 무대 위 장소가 바뀜. 같은 집이지만 중앙에 있는 하얀 현대미술 작품은 세르주의 집, 왼쪽 프로방스풍의 작품은(베르사유 어쩌구 하는 대사가 극 중에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남) 마크네 집, 오른쪽 정물화는 이반네 집. 재밌는 무대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에는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 ^^ 프로그램북 찾아보면 있을거 같기도 하지만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냥 미궁인채로 놔둬야징

 

- 애정과 놀림을 담아 흰색 판때기라고 부르긴 했지만, 세르주가 이야기했듯 이 흰색 판때기 안에는 빨강도 노랑도 파랑도 있다. 이 캔버스를 보고 그냥 '흰색이네'라고 넘기는 사람과, 자세히 들여다보고 각각의 색을, 결을, 향을, 촉감을(이건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지만)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보는 세계는 얼마나 다를까. 흔히들 취향을 이야기할 때 '감도'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무언가를 탐지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가 취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극을 통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더 세심하게 세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것. 그것 자체가 인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각자의 취향도 한층 넓어지는 것 아닐까.

 

- 극과는 크게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흰색 판때기를 보고 지난 여름 디아 비컨에서 본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링크에서도 볼 수 있듯 온갖 소재와 방법으로 흰색 판때기 혹은 종이 혹은 벽붙이장식 등 암튼 죄다 흰 것을 잔뜩 만들어서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웠는데, 심지어 한 쪽 복도에는 똑같은 흰색 판때기가 대여섯개 주루룩 걸려있기도 했다. 사실 근데 이런 류의 작품은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이 작가가 '흰색'이라는 것에 천착하고 끊임없이 몰두한 그의 작가 인생을 반영하여 가치있다고 매겨지는 것이라, 그 그림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끼긴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크가 딱히 틀린것도 아니지. 마크도 디아 비컨에서 흰색 판때기가 복도를 가득 메운 방에 들어가 앙뜨르와를 만났다면, 그의 감상이 달랐을 수 있을테니.

 

- 마지막에 의자에 앉아 멍하게 있다가 일섭이반이 친구들 손을 덥석 잡고 만세를 하며 "끝났습니다!" 하는 부분에서 아 이게 퇴근의 기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녁공연이 남아있으시지만. 거의 두시간 가까이, 인터미션 없이 세 분이서 극을 이끌어가시느라 너무 수고 많으셨음. 앞으로도 다양한 캐스팅으로 아트를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자 친구들 버전의 아트는 또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됨. 다음 시즌에 돌아오면 또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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