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국립극단의 공연을 영상화하여 상영하는 NT Live 시리즈는 올라올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챙겨보는 편. 아주 만족하면서 즐겁게 본 공연도 있고 1부만 보고 자리를 뜬 공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볼만했다 정도의 인상은 받기 때문에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덜 드는 편이다. 게다가 관람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거기다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작품인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이 올라오니 예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이 극을 보기 며칠 전, 트위터에서 티저? 광고?를 먼저 보게 되었다. NT Live 홍보는 아니고, 2023년 여름에 실연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 2022년 신작임에도 바로 재공연을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상 속의 무대가 아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무대와 객석의 (보이지 않는) 경계 사이에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실제로 공연을 가서 보았을 때, 이 빗줄기가 나를 무대로 이끌어줄지 아니면 그냥 데면데면한 장치로만 남아있을지도 조금 궁금해졌는데 저때 딱 맞춰 영국에 갈 방법은 없겠지.
- 미국이 아직 독립하기 전인 1600년대 말, 메사추세츠에서 일어난 세일럼의 마녀 재판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찾아보니 실제 기록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고, 다만 설정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은 부분들이 있다. 역사에서는 왜 베티와 아비게일이 처음 발작을 하고 병에 걸렸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작가는 여기에 소녀들의 장난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의 악의를 더한다. 여기서 '악의'가 중요한데, 매카시즘으로 인해 고통받던 작가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을 통해 미국사회를 돌아보게 만드는 한편, 나와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자들의 '악의'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 다만 위의 부분으로 인해 당시 마녀사냥의 책임이 소녀들에게 과하게 씌워지고, 메세지가 오히려 단조로워진다. (작가는 그것을 노렸을지도 모르지만...) 원인 모를 병에 걸린 소녀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 그로 인해 소녀들을 추궁하는 분위기에 겁에 질릴 수 밖에 없는 소녀들, 이들이 뱉어낸 마녀 이야기로 더욱 더 커지는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 이 완벽한 쳇바퀴 구조는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지 않아도 이런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아비게일을 평면적인 악역이자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이 사태의 책임을 돌릴 인물을 창조해낸다. 아마도 작가는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역할은 마을사람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비게일 캐릭터의 성격을 바꾼게 아닌가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에 굳이 보스턴에서 발견된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야만 했을까.
- 물론 이 광기어린 재판을 이어나간 어른들, 특히 성직자들과 판사들 등 소위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난도 느껴진다. 특히 아비게일과 소녀들의 증언이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서 말이지. 이웃들을 마녀로 무고한 사람들은 원래 마음 속에 악마가 들어앉아 있었을테니 그렇다 쳐도, 하나님의 뜻으로 이 재판을 이어갔다고 믿는 이들은 정녕 그들이 마녀라고 자백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걸까. 극 속 누군가 외쳤던 것처럼, 빌라도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보았어야 할텐데.
- 이런 과거의 극은 시대적인 부분을 감안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지만, 보다가 깜짝 놀라서 잠시 현실세계로 돌아온 부분이 프록터 부부의 대화였다. 남편이 아내에게 외도사실을 들킨 후, 몇달간 전전긍긍하며 아내 눈치를 보아야 했다는 것으로 갑자기 폭발하는 것까지는 그래... 본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라고 열심히 생각해보려 했지만, 갑자기 아내가 자기도 잘못이 있다며 자기같이 아프고 우울한 사람에게서 멀어지는게 이해간다고 하는데 아니 이게 무슨 상황...? 극이 쓰여진 1950년대, 시대적 배경인 1690년대를 생각하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장면을 보니 속이 울렁거려서 한참을 스스로 다독여야만 했다.
- NT Live 보다보면 연기력 편차가 느껴지는 경우들이 좀 있는데, 이번 연극에서는 딱히 거슬린다 싶은 부분은 없었다. 워낙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들 사이에 있다보니 헤일 목사의 연기가 좀 약해보일수는 있지만 역할상으로는 적정선이었다고 보고. 애비게일 역할은 전체적으로 음울하고 정신이 나간 못된 인간의 모습으로 잘 연기했는데, 초반에 어라 이거는 너무 연기인데? 싶은 장면도 기억나긴 한다. 아마 무대에서 보면 별 생각 없었을 것 같은데 영상으로 클로즈업해서 찍으니 어색한 그런 차이? 메리 워런 역할은 극 중에서 두 번이나 입장을 바꿔야 하는데, 배우가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해서 저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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