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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공연관람 기록

[230506]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by eunryeong 2023. 5. 17.

- 12명의 배심원들이 마지막 평결을 내리기 위해 모여 이야기하는 짧고도 긴 시간을 다룬 작품. 이 각본이 처음 쓰여진 게 1950년대 미국이었고, 이 평결의 대상이 되는 소년이 빈민가에 사는 흑인 소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갈등이 극을 이끌어가는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12명의 배심원들 대부분이 번듯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들 중 빈민가의 삶을 이해하는 캐릭터가 단 한명인데, 아마 외국에서 올라왔다면 이 역할은 흑인 연기자가 맡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 배심원들은 대부분 소년이 유죄라고 확신하지만 단 한 명의 인물은 너무나 잘 짜여진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재판에 의구심을 느끼고 몇가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모이고 모여 평결을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처음 이의를 제기하고 11:1에서 소수 의견을 관철한 인물이 결코 이 소년이 무죄라는 확신이 들어서, 혹은 유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또한 유죄에 더 가까울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마음 한 켠에 드는 의구심, 이것때문에 유죄 평결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유죄 평결을 내린다는 것이 배심원으로서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소위 여론재판이라는 것이 더 무서울 때도 많다. 한쪽의 의견만 보고 너무나 쉽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유죄'라고 단정지어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의견이 올라오고, 처음의 글이 편향되어 있었음이 발견되면 또 다시 처음 글을 올렸던 사람에게 죄를 묻고 자신은 그럴수밖에 없었다며 빠져나간다. 사실 배심원들조차 처음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듣고 바로 평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몇번의 공방을 모두 지켜본 다음에 판단하게 되는데, 아무런 권리도 없고 배경지식도 전무한 이들이 손쉽게 정의를 내세우며 타인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 처음에 유죄에 투표를 했던 배심원들 또한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재판에서는 검사의 주장이 논리정연하게 들렸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었다. 반면 소년의 알리바이는 입증되지 못했고 의심스러운 정황증거도 여럿이었다. 이 상황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이 더 이상하게 들리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소수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배심원들의 반응이 여럿 나뉜다. 무시와 조롱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굳이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다지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그의 의견에 귀기울여주자고 처음부터 지지해준 사람은 이 배심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 한 명 뿐이고, 이 분으로 인해 극이 10분만에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어르신에게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논리라는 측면에서는 당시 유죄를 이야기한 측이 더 탄탄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완벽한 논리를 깨부수는 것은 아주 작은 틈,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당시에는 완벽한 천동설의 이론에 비해 엉성하고 헛점도 많았음에도, 천동설로는 설명되지 않는 몇가지 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결국 진실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의미있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법을 키워야겠지. 매번 고민하고 매번 배운다. 그럼에도 쉽지 않고.

 

- 나의 주장은 어느 배심원과 가장 비슷할까에 대해서 자연스레 질문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4번 배심원이랑 가장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명확하게 존재하는 이상, 이 외의 정황증거에 대한 의심만으로 무죄를 선고하기에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결정적으로 보였던 증거도 마지막에 의심의 여지가 생겼지만) 다만 실제로 재판을 봤다면 그 엉성하기 짝이 없는 증거들을 보며 먼저 엥? 이걸로? 진짜?라고 질문을 했을법하기도 하고. 근데 극을 보면서 계속 궁금했던게, 배심원은 재판에 나온 증거만으로 판단을 하는거지 재판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정황증거들을 추리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명확하게 나온건 없네.

 

- 페리클레스와 어디더라... 암튼 유인촌씨 나온 연극에서 자주 본 기억이 있는 김도완 배우와, 작가노트에서 본 강진휘 배우가 캐슷에서 보여 반가웠다. 특히 강진휘 배우는 전작과 완벽하게 다른 매사에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박한 사람을 연기하는데, 이 연기도 참 잘 어울리는게 신기했다. 하긴 그러니까 연기자인가? 다른 연기자분들도 모두 멋진 연기 보여주셨고, 특히 극을 처음부터 이끌어갔던 8번 배심원 역할의 한상훈 배우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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