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이것저것

'감도가 높다'는 표현에 대해

eunryeong 2022. 12. 1. 23:56

    이전에 취향을 수식하는 문구들 중에서 '감도가 높다'라는 표현에 대한 짧은 생각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사전적 의미의 '감도'가 취향을 서술하기에는 분명 적절하지 않지만, 보다 다양성을 즐기고 미감에 민감한 취향?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디테일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감도가 높은 취향이라고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생각의 흐름이 궁금하신 분들은 연극 '아트' 후기를 참고하시길)

 

    그렇게 열심히 혼자만의 타협을 거듭하여 내 나름대로 '취향의 감도'라는 표현에 대한 의미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이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예는 이보다 훨씬 다양했다. 심지어 대부분 감도 높은 취향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고급스러운 혹은 아주 올곧은 단일한 취향을 가진- 그래서 쉽게 어느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취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나마 사전적 의미와 최대한 맞춰본 '감도 높은 취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용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불편한 마음을 애매하게 안고 가고싶지 않아서 이 단어를 다들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좀 더 찾아보기로 했고, 이에 네이버에서 '감도가 높다'는 표현을 검색했더니 가장 위에 국립국어원 문의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어느 분이 질문하신 것과 그에 달린 답변을 보게 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감도'는 '외부의 자극이나 작용에 대하여 반응하는 정도/ 수신기나 측정기 따위가 전파나 소리를 받는 정도/필름이나 인화지가 빛을 느끼는 정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를 참고하면 '감도가 높다'를 '감각적이다'라는 의미로 쓰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만, 언어는 창조성이 있으므로 새로 쓰이는 표현을 무조건 틀린 표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페이지의 질문 및 답변 바로가기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국립국어원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첨언한대로 언어의 창조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 또한 무시하기 어려운 의견이다. 다만 언어의 창조성을 가지고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니까.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용되는 케이스를 모아보면 중구난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감도 높은 큐레이션. 감도 높은 퀄리티. 감도 높은 스포티룩. 감도 높은 브랜드. 감도 깊은 취향 셀렉트샵.(심지어 감도가 '깊은'건 뭐지?) 감도라는 단어가 사전적 의미 그대로 편하게 이해가 되는 문장은 마우스 감도에 대한 질문과 사진기 ISO 감도 뿐이었다. 앞에 취향, 브랜드 관련 단어들은 '감각적인'으로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것 같은데. '높다' 혹은 '깊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 취향의 우열을 드러내기 위해 굳이 '감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불필요한 단어를 배제하고 명확하게 의사전달을 할 수 있도록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기에, 의미의 고찰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표현들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그냥 넘기는게 쉽지 않다. 물론 그 단어를 쓴다고 해서 '왜 그런 단어를 써?'라고 어떻게 직접 이야기 하겠는가. 그냥 이런 곳에 자잘하게 내 생각이나 한조각 남기는거지. 그렇지만 예전에 '시니컬'이라는 단어가 '시크'와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웃지 못할 과거를 돌이켜보면, 언젠가 이 표현도 조금 더 날카로워지거나 아니면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거나 하지 않을까 희망이 생긴다. 그때까지는 거스러미와 같은 이 마음을 계속 안고 있어야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