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공연관람 기록

[230121] 연극 <갈매기> 후기

eunryeong 2023. 1. 24. 23:12

    연휴기간동안 미적미적대다가 막판에 몰아적는 관극 후기. 서사가득한 후기라기보다는 기억에 남는 몇몇개의 인상비평 정도일 듯 합니다. 그래도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으니까 짧게나마 적어봅니다.

 

- 체홉의 극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올라올때 즈음에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막상 연극을 보기 시작한 이후에는 극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일단 한국에 자주 올라오지 않기도 하고, 가끔 올라오는 극도 현대판으로 어레인지된 버전이 많아서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기도 했고. 이번에 올라온 체홉의 <갈매기>는 상대적으로 클래식한 연출 그대로 가져오는 것 같아서 한번 표를 잡아보았다. 참고로 연극치고는 표가 꽤 비싸다. 아마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 배우들이 꽤 많아서가 아닐까 싶음. 공연장 규모도 규모고.

 

- 역시나 사전정보 거의 없이 갔는데 니나의 극중극 대사를 듣고 어? 이거 분장실에서 그 대사 아닌가? 싶어서 인터미션 시간에 찾아봤더니 맞네. 재작년에 보았던 연극 <분장실>에서 여배우들이 꿈의 배역이라고 이야기하던 니나 역이 바로 이 극의 니나였다니. 오늘날의 시선에서는 니나라는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인 남자 잘못 만나 인생이 꼬인 캐릭터랄까... 그래서 조금 미묘하긴 한데, 그래서 배우들에게 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반부의 밝고 명랑한, 젊고 생기있는 매력이 자연스럽게 뿜어나오는 연기를 하다가 후반부에서 인생의 풍파를 한 몸에 다 받은 여인으로 변해야 하니까.

    그 와중에 전반부와 후반부에 들어간 1인극 대사 낭독 장면을 각자 다른 느낌으로 소화해야 하는데, 이 극을 따로 소화하는 것만 해도 만만찮다. 여배우C가 계속 대사를 헷갈려했던 이유를 알 정도로 스토리와는 뚝 떨어진 내용, 맥락없는 전개의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데 또 그걸 관객에게는 어떻게든 전달해야 함. 올해 3월에 분장실이 다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이 이 극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 극 중에서 인기 작가인 뜨리고린이 톨스토이(였는지 도스도옙스키였는지 둘 다 였는지...)와 같은 천재 문학가와 평생 비교당하며 비판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대해 한탄하는 대사가 있는데, 체호프 본인의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창작자의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이 되었고. 물론 그렇다 해서 어리고 멋 모르는 니나를 꼬드기고 책임지지 않은채 버린건 용서되지 않지만.

 

- 주치의로 나오는 도른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뜨레블레프의 작품을 이해하고 좋은 평을 내려주는 사람이 도른 한 명 뿐인데 그가 계속 격려를 보내준다. 도른 외의 다른 사람들, 특히 유명배우인 어머니 아르까지나와 인기작가인 뜨리고린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고 뜨레블례프의 연인이었던 니나마저 극을 연기하면서도 내용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

    이 즈음에서 드는 생각이, 도른의 격려가 선한 의도 혹은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할 지라도 실상은 애매한 재능을 응원하는 것이었다면 그 응원의 결과는 한 사람의 인생을 비극의 소용돌이로 이끌고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첫번째. 그리고, 누군가의(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의) 마이너한 취향으로 여러 음악가 혹은 작가들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것이 그들에게 힘이 되기도 하겠지만, 엄밀히 말해 돈이 되지는 않을 일에 너무 많은 열정과 시간을 쏟아붓도록 강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고민이 두번째.

 

- 체홉의 작품을 대체로 깔깔까지는 아니라도 피식 피식 웃으며 봐왔는데, 이 극은 아무리 봐도 웃을만한 장면은 그다지 없고 마음 한 켠이 답답해지는 느낌만 받았다. 망한 사랑이 몇 개 나오는건지 셀 수도 없을 정도고, 그냥 사랑만 망하는 게 아니라 인생도 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편한 마음으로 보기는 힘들다.

 

- 이순재 배우님은 이전에 후기를 적었던 연극 <아트>에서도 보았고 그 전에도 연극 몇 편에서 뵈었다만, 이번 연극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았어서 연기에 대해 이렇다 할 부분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 커튼콜에서 연극에서의 역할 비중에 따른 순서가 아니라 가장 마지막에 이순재 배우님이 나오시는 장면이 조금 묘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이번에는 연출을 겸하셨으니 연출 직위로 커튼콜에 함께 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되기도 한다. 참고로 이 극은 앞에서도 한번 이야기했듯 굉장히 클래식한 연출이라, 연기에서 딱히 디렉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캐슷으로도 보면 아마 알 수 있을지도.

 

- 예매할 때 캐슷을 일부러 맞춘게 이순재 배우님 외에 김수로 배우, 고수희 배우였는데 두 분 모두 극중 비중이 높지는 않아서 아쉬웠다. 김수로 배우의 도른은 연기자 특유의 여유로움과 능청스러움을 잘 살려서 아주 좋았고, 고수희 배우야 연기를 말해서 뭐하나.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그나마 연극에서 몇 안되는 웃포도 잘 살려주시고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셨다.

    아르까지나의 이향나 배우님은 이번에 처음 본 것 같은데, 연기가 와... 천상 여배우 느낌. 목소리 톤부터 자세가 딱 저 시대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애티튜드였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딕션도 아주 좋았고. 그리고 니나 역의 진지희 배우도 1막의 극중극 장면을 너무 잘 소화했음. 2막에서의 연기를 가까이서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앞으로 무대연기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권화운 배우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뜨레블례프 이미지에 잘 맞았던듯. 

 

- 무대도 굉장히 클래식한 구성이라 크게 언급할 부분은 없는데, 극중극을 올리는 무대의 막 설치하는 부분이 너무 부실해서 그랬는지 배우들이 한두번 들락날락하니 아예 무대가 무너져버려서 좀 당황했다. 나중에 치워야 해서 일부러 이동식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하고, 그 부분이 쓰러져도 크게 다칠만한 상황은 아니긴 했지만. 근데 요즘 이렇게 무대 사고?라고 해야하나, 이런 상황을 종종 보는데 내가 유독 그런 상황을 많이 보는건지 아니면 요즘 무대들이 전체적으로 우당탕인건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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