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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공연관람 기록

[230212] 음악극 <올드위키드송> Old Wicked Songs

by eunryeong 2023. 2. 15.

- 슈만의 가곡들이 나오는 극, 나이든 스승과 젊고 혈기왕성한 제자의 이야기.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약간은 충동적으로 예매한 극. 슈만 또한 좋아하는 작곡가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성악곡은 그다지 듣지 않는 터라 음악에 대한 흥미도 덜했고, '음악극'이라는 형식이 좀 애매할 것 같다는 선입견도 있어서 망설이다가 마지막에서야 겨우 한장 잡아보았다.

 

- 노년의 거장(혹은 선생)과 젊은 제자(혹은 조수, 논객)을 다룬 극이 기억나는 것으로만 세번째인데, 세 번 모두 완전히 다른 결의 감정선이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트 세션과 레드는 첫 만남에서는 어느정도 호의적이었다면, 올드 위키드 송에서의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아주 좋지 않았다. 기대했던 스승에게서 바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던데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피아노 연주와 아무 상관없는 성악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화가 많이 난 스티븐과, 그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하기에 적당히 받아주기도 하지만 본인 수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 마슈칸.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 가장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지만 말이다.

 

- 초반에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효율적이지만 단조로운 미국식 건축과 화려하지만 비효율적인 장식이 가득한 오스트리아의 건축에 대한 대비에서, 그냥 비엔나에 오래된 건물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 뿐인게 아닌가... 싶었다. 미국에서도 백년 이상 된 건축물은 충분히 현란한 장식물들이 많이 달려있는데... 특히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는 시카고에 가면 다양한 장식이 달린 고층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말이지. 아니면 비엔나에서는 최근에 지어지는 건축물들도 장식들을 많이 달아두는 편인가? 이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티븐과 마슈칸의 이 건축물 논쟁에서, 전형적인 미국인과 유럽인의 스테레오 타입 선입견을 각 캐릭터에 부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스티븐과 마슈칸의 대화에서 미묘하게 다뤄질듯 말듯 하다가 나중에 폭발하게 되고야 마는 그 주제,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어느정도 반전이랄까? 대강 예상이 가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반전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스티븐이 갑자기 열혈유대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 행동해도 아무런 사회적 제약이 없는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마슈칸이 본인이 겪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반유대주의적인 언행을 유지하는 것 또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유대인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스티븐은 본인이 희생자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며 마슈칸을 비난하지만, 알고 보니 마슈칸이야말로 그 희생자 본인이었다.(이것이 밝혀지는 장면을 마슈칸 팔에 새겨진 수감번호를 드러내는 것으로 연출한다) 

    또 다른 한가지 생각. 스티븐은 본인이 유대인 희생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대변하는 듯 분노하며 열변을 토하지만, 막상 그 참상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후세대들이 수용소를 둘러보는 것조차 만류한다. 그들이 자신이 아끼는 손녀, 혹은 제자가 수용소를 둘러보는 것을 만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자기가 그 곳에서 버텨야 했던 참혹한 상황이 부끄럽다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존엄을 대부분 포기해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 아픈 기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스티븐이 어릴때 영재라고 불렸지만,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한게 아니고 타인의 모자를 썼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동경하고, 그가 되고 싶어하고, 그를 열심히 따라하고 모방하면서 조금씩 나의 길을 찾게 되는 것 아닐까 싶지만, 스티븐에게는 그게 타인들을 속이고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라는 생각이 커서 더 힘들어했던게 아닐까. 아마 어렸을 때 영재라고 불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이것 저것 경험하면서 본인이 스스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여담이지만 굴드의 모자를 쓰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할 때 허밍까지 따라하는 건 좀 귀여웠다.

 

- 마슈칸 역의 서현철 배우는 몇몇 연극에서 보았었기에 연기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고, 기대했던대로 아주 멋진 마슈칸 연기를 보여주었다. 다른 극에서도 약간은 연극적인? 고전적인? 운율을 넣어 대사를 읊는 톤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서현철 배우가 연기한 마슈칸 또한 느긋하고 괴팍한 유럽 노인네라는 설정에 걸맞는 대사톤이라서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스티븐 역의 정휘 배우는 아마도 처음? 인거 같은데, 2층에서 보아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그리고 연기가 좀 급작스럽다고 해야하나, 차분하게 대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분노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스티븐의 감정이 와닿지 않았다. 오페라를 처음 본 날 기쁨에 겨운 몸짓과 대사는 귀여웠다만 ㅋㅋㅋ 

 

- 무대디자인이 꽤 재밌었는데, 전면에 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비치는 듯한 연출도 좋았고 후반부에 비가 거세게 내리는 장면에서 진짜 비가 내리는듯한 일렁거림?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물줄기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진짜 물인가? 설마...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찾아보니 진짜 물을 부어버리는 것이 맞다고 한다.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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