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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공연관람 기록

[221120]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마지막 공연 후기

by eunryeong 2022. 11. 22.

- 제목은 몇번 들었었고, 괜찮은 극이라는 후기를 본 터라 시간되면 한번 봐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좀 늦게 보러가려고 생각했더니 이미 표가 거의 팔려서 자리가 없었던지라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하며 넘길뻔 했다. 그러다가 밤 늦게, 연극을 하나 예매한 김에 그날 볼 수 있는 다른 극이 있는지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연극 마지막 자리가 하나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홀린듯이 예매해버렸다. 우연찮게도 마지막 공연을, 마지막 공연날에 바로 예매하게 되었으니 나름 운이 좋다고나 할까.

 

- 사전정보 없이 그냥 되는 날짜에 온 터라 배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일단 예매했다. 배우들 이름을 살펴보는데 포스너 배우는 얼마전에 여보셔에서 본거 같고. 박은석 배우는 스카이캐슬에 나왔었다는 사실로 알고 있고. 오대석 배우 분명 어디선가 본거 같은데 긴가민가하고... 나머지 배우들은 모두 초면. 거기다가 남는 자리 겨우 들어간거라 배우들 구분이 거의 안되는 자리라서 그냥 극의 흐름만 열심히 따라갔다. 그럼에도 스크립스 역할을 맡은 강찬 배우는 서술자 역할을 아주 차분하게 잘 해줘서 인상적이었다. 약간 이런 서술 담당 캐릭터 좋아하는 편이라 더 그랬을지도? 오대석 배우는 연기를 너무 잘해서 내가 설득당해버렸던게 분했다. 저런 캐릭터에 설득당하면 안되는데. 박은석 배우의 어윈도 이상하게 자꾸 생각남. 

 

- 어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사학자들이 종종 쓰는 삐딱하게 보기, 일단 다른 시각으로 보기 전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뭐 고고학이 아닌 이상에야 역사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같은 사실을 두고 새로운 해석을 끼얹어 마치 전에 없던 것인것마냥 주장하는 경우도 분명있긴 한데. 그게 과하면 연극에서처럼 홀로코스트를 다루게 될 수도 있고, 한국전쟁을 두고 북침설 혹은 남침유도설 같은 허무맹랑한 음모론이 나돌게 될 수도 있으니. 어윈도 학생들의 홀로코스트 토론장면을 보며 내가 잘못 가르쳤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 그런데 한편으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건들과 비교하면 할수록 그 비극이 더 크게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얼마나 효율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이 체계가 돌아갔는지, 그리고 외부 사람들은 결코 이 현실을 알 수 없게 철저하게 감추어졌는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처리'되었다는 것은 이 비극을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한편, 정도가 덜할 뿐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차별이 현대 사회의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 헥터의 교육도 의도한 것과 다르게 전달된 것은 마찬가지. 아니, 이건 헥터의 전달방법 자체가 잘못 되었다. 헥터가 수업을 통해 가르치는 내용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남의 말로 대화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기 의견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글귀들을 여기저기서 따와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이미 일상대화에서 본인들의 언어적 양념으로 사용하고 있던 그 글귀를, 왜 시험답안에는 사용하면 안된다는건지? 그리고 일단 무엇보다, 학생들의 시간을 교사 자신의 지적 즐거움을 위해 낭비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험에 나오는 지식만 전달해야 된다는 것은 아닌데, 최소한 학생들과 상호 합의가 된 수업인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엇보다 학생들 스스로도 그 수업시간동안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요.

 

- 아 그리고 일단 헥터는 논할만한 가치도 없는 개쓰레기 짓을 저질렀으므로 교육이고 뭐고 다 소용없습니다. 진짜 린톳 선생님이 폭발할 때 나도 같이 버럭 소리지르고 싶었음. 교사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주제에 뭐가 어째? 

 

- 학생들이 나오는 장면은 대부분 너무 산만해서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등장인물이 많아서일수도 있고, 막공이라 그랬는지 조금 들뜬 애드립이 가득해서였을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흐름이 살짝씩 끊긴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 극을 처음 보는 내가 재밌는 부분에서는 다들 조용한데, 이게 뭐지? 싶은 장면에서 다들 웃음이 빵 터지니 따라가기가 좀 힘들었던 것도 있고.

 

- 조지 오웰이 오래 살아있었으면 극우주의자가 되었을거라는 대사를 듣고, 한국에 완벽한 예가 있지 라고 생각하며 끄덕끄덕.

 

- 데이킨과 어윈의 담배 씬이 여태 내가 본 연극과 뮤지컬을 통들어 가장 묘한 기류가 흐르던 장면인듯. 서로를 당기면서도 밀어내는 그 팽팽한 긴장감이 잘 느껴지더라. 담배 한 개비를 돌려가며 피운다는 게 이렇게 성적인 뉘앙스 가득한 사건일줄이야. 근데 둘 사이의 기류와 그 때의 흐름은 약간 충동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게, 조금 더 진지한 마음이었다면 어윈의 사고 이후에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긴 관계가 진지하게 흘러갈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

 

-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없는 극은 처음인거 같다고 생각했다가, 최근에 본 아트와 여보셔, 지크슈까지 죄다 여성캐릭터는 거의 전멸이구나 싶었다. 군대, 남학교, 2천년전의 사도집단을 다룬 극이니 어쩔 수 없는가 싶다가도, 여성 배우들이 설 곳은 어딘가 안타깝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린톳이 HiStory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에서 여러모로 공감하며 끄덕끄덕. 그 발언이 11명의 남자배우와 1명의 여자배우로 구성된 극에서 나온다는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 어쩌면 이건 자아비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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