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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공연관람 기록

[230128] 연극 <레드> 관람 후기

by eunryeong 2023. 1. 30.

- 후기를 쓰기 가장 편한 극은 보고 나왔을 때 몇 가지의 좋은 요소들을 발견한 좋은 극이다. 가장 어려운 극은, 마음에 드는 장면들과 요소들이 너무 많아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상념들이 얽히고 설힌 극이다. 여러번 볼 예정이라면 적당히 나눠서 적어도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생각들을 지금 적어놓지 않는다면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것이기에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극이 내겐 딱 그렇다. 아마 열심히 후기를 적어도 연극을 보았을 때 든 생각의 반절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지만, 그것이나마 붙들어보려고 일단 후기를 올린다. 이 항목은 후기를 어느정도 적은 후 중간에 넣은 부분인 것도 미리 적는다.

 

- 블로그에서 몇번 뮤지컬 공연 후기 작성할 때 신시컴퍼니에 대한 찬양을 적은 적이 있는데, 이 제작사에 대한 사랑은 사실 뮤지컬보다는 연극에서 먼저 시작했다. 가장 처음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극을 본 것이 2016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햄릿'이었기 때문. 다시 올라올지 어떨지 기약없는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도 신시컴퍼니 연극이고, 이 외에도 연극 라인업들은 대체로 내 취향에 가까웠다. 당연히 '레드'도 2019년 공연때 이미 예매를 했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결국 예매만 해두고 보지는 못했던 극.

    건강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라(그렇다고 엄청 나쁜것도 아니지만) 공연을 예매해두고 정작 당일날 몸상태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이렇게 못본 공연은 이상하게 다시 예매해서 봐야지 하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래서 2019년에도 결국 마지막까지 보지 못했고, 이번에도 미적미적 미루다가 공연 막바지가 되어서야 표를 한 장 잡았다. 물론 할인과 함께.

 

- 연극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왜 이걸 이제야 본걸까? 에 대한 여러가지 후회. 스토리만 얼핏 보았을때도 내 취향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막상 연극을 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흥미로웠다. 물론 근현대 미술가들과 미술작품, 그리고 근현대 건축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원활하게 극을 이해할 수 있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이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흥미롭고 재밌는 요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연극이 처음 올라온 극장이 던마 웨어하우스(Donmar Warehouse)인데, NT Live로도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영국 국립극단의 코리올라누스(Coriolanus) 공연으로 알게 된 장소이고 덕분에 영국 여행갔을 때 일부러 한번 찾아본 곳이기도 해서 더 반가웠다. 

 

- 공연을 보기 전에 프로그램북을 구입해서 훑어봤는데 오랜만에 굉장히 알찬, 극에 대한 이해를 한껏 높여줄 수 있는 내용이 충실히 담긴 프로그램북이라서 기뻤다. 이전에 국립오페라단 프로그램북을 찬양한 적이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 국공립 단체와 오직 관객의 구매에 의존해야 하는 사기업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어려운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같은 사기업의 기준으로 '레드'만큼은 해줄 수 있지 않은가. 저렴한 가격을 바라는 것은 포기했으니 내용만이라도 제발 충실하게 채워줬으면... 

 

- 이 극은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 두 명의 등장인물로만 극이 진행된다. 마크 로스코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걸어둘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과정에서 둘이 나눈 대화들과 작업들, 그리고 이 의뢰를 포기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마크 로스코가 그림을 의뢰받고, 제작을 시도하고, 나중에 의뢰받은 것을 다시 취소하는 것까지는 실제 있었던 일. 그러나 조수가 있었던 것, 그와 나눈 대화들은 상상, 혹은 창작. 마크 로스코라는 인물이 극 중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실제 마크 로스코가 충분히 내뱉을법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극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니 고소 당할 위험은 없었겠다 싶다.

 

- 마크 로스코와 켄의 대화는 양 쪽 모두 이해가 되는 부분과 되지 않는 부분들이 혼재한다. 초반에 마크 로스코의 작업중에 갑자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버린 것은 당연히 켄이 실수한 것이지만, 켄의 예술적 관점을 일일이 부정하고 짓밟아버리는 마크 로스코의 말 또한 굳이 그렇게까지? 싶기는 하다. 켄에게 온갖 철학자와 대문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을 공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탄식을 내뱉는 모습은 누가 봐도 꼰대 맞지. (물론 켄이 너무 공부를 안하긴 했다. 1950년대에 예술을 한다면서 프로이트도 제대로 모르는 게 말이 되나...) 거기다가 무조건 네, 좋아요 가 기본인 세태를 비판하면서 정작 본인의 작품관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켄에게 그렇게 무섭게 몰아붙이는건 뭔가 싶음.

    그렇지만, 초반과 중반까지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있던 마크 로스코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점이 이 연극의 가장 포인트이기도 하다. 켄의 의견 그대로를 받아들인건 아니지만 최소한 마크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시발점이기는 했으니까. 그리고 켄을 조수가 아닌 하나의 예술가로 인정하고 그와 동등한 관계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도 하고. 

 

- 켄과 마크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고용주인 마크 로스코가 조수인 켄을 고용할 때 명확하게 켄의 바운더리를 설정했다. 마크가 작품을 만들 때 보조하는 역할.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오고 물감을 적당한 색으로 섞고 화실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역할. 처음 같이 작품을 하면서 마크가 자신에게 하는 질문에 켄이 무심코 대답했을 때, 켄이 아무 말 못하고 조용히 있었던 것 또한 본인이 실수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한번 더 말대꾸...를 하긴 하지만) 

    켄도 마크의 이야기에 원론적으로는 동의할 것이지만, 2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하면서 아주 인간적인 기대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같이 작업실에서 함께하는 자신과 조금 더 사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는 마음.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평가를 받고 싶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서로의 집에 한번씩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마크에게는 켄이 이 부분을 지적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켄을 고용할 때 명확하게 자신의 요구조건을 다 이야기 했기 때문에.

    이 두가지 관계정의의 간극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간극을 유지한 채 계속 이어질수는 없다. 이에 마크는 관계 자체를 부수고 다시 만들어버린다. 켄은 더이상 마크 로스코의 조수가 아니고, 마크는 동료 아티스트인 켄의 집에 방문할 약속을 하는 것으로. 이는 마크의 원칙(이라기보다는 아마 작업할 때 이런 관계가 편해서 아닐까...? 잘은 모르겠지만)과 켄의 바람을 이상적으로 잘 해결한 것이긴 하지만, 한편 켄은 이제 돈을 어디서 벌어야 하나...하는 현실적인 생각도 살짝 들었다. 아마 마크가 추천서 잘 써줬겠지?

 

- 마크 로스코를 연기한 유동근 배우는 이번 작품이 첫 연극인것 같았는데, 프로그램북에서 굉장히 부담이 많이 된다고 적어두었더라. 아무래도 자신의 목소리와 신체연기 만으로 무대와 객석을 가득 메워야하기에 매체연기와는 다른 결의 연기가 필요하기도 하고, 이 연극 자체가 워낙 텍스트도 많고 배우에게 맡기는 부분들이 많다보니 이에 대한 고민도 많았던 듯 하다.

    사람마다 평이 다를법한 부분이지만 나는 동근로스코의 연기를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다. 긴 대사를 마치 시를 읊는듯 리드미컬하게 처리하는 데, 이런 대사처리에서 아 마크가 굉장히 고전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이 확 다가오는게 좋았다. 대사 톤도 평소 유동근씨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는데 아마 유동근씨가 생각하는 마크 로스코의 이미지에 맞춰 대사 톤도 맞춰온 듯 했다. 몇몇 장면에서 음량이 확 작아진다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연극배우 중에서도 이 정도 음량인 배우들을 꽤 많이 봐왔기에 유독 유동근 배우에게 이런 후기가 많은게 잘 이해가 가진 않는다. 오히려 3층 가장 가장자리쪽에서 봤지만 연극 대부분의 장면에서 목소리가 잘 들려서 좋다고 생각했거든.

 

- 켄을 연기한 연준석 배우도 이번 공연으로 처음 접했는데 아직 작품이 많지 않은 신인?인듯 했다. 초반의 기합이 팍 들어간 부분부터 마크한테 굴리고 굴려지는 장면까지 연기를 깔끔하게 하는듯. 켄이라는 역할이 잘못하면 약간 징징이...?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캐릭터는 아님), 선을 잘 맞춰서 연기를 보여주어 켄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 장면전환에서 무대가 완전히 암전되고 큰 소리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데, 아마도 세번째? 로 나온 음악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 2번 5악장이어서 굉장히 반가웠다! 연주하는걸 들어보니 음이 다-단--다란--다-단 요렇게 연결되는 부분에서 마지막 '단'이 굉장히 짧은데, 내가 자주 들었던 연주들은 다 이 부분을 충분히 길게 끌고 가는 편이라서(야샤 하이페츠, 이자크 펄만, 정경화 등) 이 연극에서 사용된 곡의 연주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했음. 1970년에 돌아가신 마크 로스코 선생님이 실제로 틀었을법한 그 당시 연주를 가져왔을라나 싶기도 하고.

 

- 지난 여름에 MOMA에서 보았던 앙리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도 이야기 중간에 꽤 심도있게 언급되어서 반가웠다. 극의 제목이기도 한 '레드'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오고 가다가 '레드 스튜디오'에서 만난 레드를 가장 생명력 있는 레드라고 이야기했는데, 2022년 여름에 이 작품 앞에 선 내 눈에는 레드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에서 마크 로스코도 이제는 레드 스튜디오를 다시 보아도 그때 그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야기한것 같은데(정확한 대사인지 기억이 안남) 하물며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이 작품을 보고 같은 감동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되겠지.

 

- 마크 로스코가 작품이 걸려있는 장소와 주변 환경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느껴진다며, 작품이 걸려있는 장소에 대한 다양한 요소를 모두 통제하려 한다는 부분에서 생각난 에피소드. 내가 처음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만난 곳은 일본에 있는 후쿠오카 미술관이었는데(정확한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공원 안에 있었음) 이 곳에서도 여느 미술관처럼 다른 여러 작품들과 함께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 미술관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이 작품을 맞닥뜨리게 되었고, 내 키와 어깨너비를 훌쩍 뛰어넘는 색채가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 그림에 압도되어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후 마크 로스코의 여러 작품을 보게 되었지만 그 작품을 만났을때만큼 인상적인 순간은 없었다.

    아쉽게도 지금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은, 평범하게 하얀 벽의 적당한 조도의 조명 아래 다른 작품들과 같이 미술관에 걸려있다.

 

- 그냥 몇 가지 재밌었던 지점들. 마크 로스코가 켄에게 좋아하는 화가를 물었을 때 잭슨 폴록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한국의 사회생활이 생각나서 실소가 나왔음 ㅋㅋㅋ 리히텐슈타인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니 "만화책"이라고 불러버리는 패기는 또 뭐며! 앤디 워홀이 먼 훗날 미술관에 걸려 있을것 같냐고 마크 로스코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켄이 지금도 걸려있다고 하자마자 속으로 '2023년에도 걸려있어요!' 하고 싶었고, 뒤이어 마크가 갤러리 놈들의 농간(대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충 이런 결이었음)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또 속으로 격하게 공감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시장도 돈이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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