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2] 빈센트 발 : The Art of Shadow

2022. 12. 10. 14:21Diary/전시 리뷰

- 낙서같기도 하고 작품같기도 한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었던 빈센트 발 전시에 다녀왔다. 이런 류의 위트있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를 오랜만에 보러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알찬 구성이었고 생각해 볼 거리도 많았다. 분명 이 작가는 평소에도 장난기가 가득한 사람일 듯. 그림자의 순간을 포착하여 만든 낙서들이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은 그림자와 낙서를 함께 담은 사진이었지만, 몇몇 작품은 파레트를 쌓아 만든 전시대 위에 오브제와 조명을 설치해서 진짜 그림자와 작품을 연결해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사실 어느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긴 했다만, 작가가 이렇게 공간을 구성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작품이 디지털작업(흔히 말하는 '포토샵')을 거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때문인 듯 했다. 포토샵과 CG. 쉽게 가상의 공간과 사건을 그려낼 수 있기에 마술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들. 혹은 의심하는 사람들.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012

 

- Typeslicer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슬라이서의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으로 세계를 아주 멋지게 확장시킨 작품. 특히 남자가 앉아있는 구도와, 벽이 중앙을 향해 살짝 기울어진 집중선 형태의 무늬들이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메모지와 펜이 왼쪽에 있는걸 보니 이 남자분은 왼손잡이신가보다.

 

 

- 피아노 필러 콘체르토라는 제목의 작품. 이번에는 슬라이서의 날을 피아노 건반으로 바꾸어버렸다. 게다가 슬라이서의 전체적인 형태마저도 피아노의 유려한 곡선이 떠오르는 직관적인 매치.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에 '필러'를 붙인건, 슬라이서보다 필러가 다른 단어들과 더 어울려서라고 밝혔다. 그걸 또 슬쩍 고백하는 것도 어딘가 귀엽다.

 

 

- 인생이 파란색으로 점철된 사람으로서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푸른빛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맑고 깨끗한 유리잔으로만 보이는 물체에서 빛의 결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고 작품으로 그려낸 것도 신기했지만, 일단 파랑파랑해서 그냥 좋다. 마음에 들어.

 

 

- 칵테일 잔의 모양을 손전등 혹은 감옥의 탈옥감시등? 으로 생각한 부분이 재밌었다. 초록색 빛이 도둑을 비추는 것을 보니 약간 레이저를 쏘는 느낌, 혹은 적외선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느낌도 들고. 

 

 

- 플라스틱컵 여러개를 겹쳐서 수영장의 계단을 만들어냈다.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이 작품들이 우연에만 기대지 않는다는게 잘 표현된 작품.

 

 

- 물컵의 일렁이는 그림자들을 수영장 표면으로 만들어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약간 진부한 방식이지만, 그럼에도 이 물결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놓칠수가 없었다. 이 사진을 전시 포스터로 사용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한편, 이 작품과 다른 작품간 그림자를 이용하는 방식에 거리가 좀 있다보니 이 포스터를 생각하고 전시를 보러왔을 때 살짝 실망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 갈색 유리컵으로 사막을 표현하다니. 크. 그냥 봐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작품에 설명을 덧붙이는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

 

 

- 미러볼 빛을 휴대폰 불빛으로 만들어버리다니 ㅋㅋㅋㅋ 사람들은 아주 까맣게 그린거도 불빛들과 확연히 대비되어 보여서 재밌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대체적으로 무표정하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아날로그 필름통을 성으로 표현한 이 작품의 제목은 '35mm 아래로 추락'. 제목이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ㅋㅋㅋ 이 작가의 제목 짓는걸 보면 약간은 아재개그 스러우면서도 그게 또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관적이고 위트있고, 무엇보다 너무 있어보이려 하지 않아. 

 

 

- 이 작품은 그림만 보았을 때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가 작가의 설명을 읽고나니 다시 보게 된 사진이다.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뒤 'Black Lives Matter'라는 슬로건으로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나도 무언가 하고 싶었다. 그 시작으로 이 맥도날드 컵이 적절한 오브제로 보였다. 이미지를 찾기 위해 컵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플라스틱 뚜껑을 조금 망가트리게 되었는데 부서진 틈새로 비친 빛이 놀랍게도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보였다. 여러분은 이 그림에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찾으셨나요?

 

 

- 위의 사진처럼 여러가지 의미가 담긴 작품도 물론 좋지만, 역시 내가 더 마음에 드는 건 이런 작품이다. 생각하는 사람 석상의 그림자를 가지고 끊임없이 떠드는 사람 얼굴을 만들어 내는 이런 위트. 어쩌면 저 생각하는 사람은 MBTI가 N형이 아닐까? (아무말)

 

 

- 락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작품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저 봉긋 솟아오른 리젠트 헤어를 보라! 락큰롤의 피가 끓어오르지 않느냐구!!! 거기다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오브제가 나사와 볼트,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재라는 것도 완벽하다. 작품의 제목이 아무런 변주 없이 'Heavy Metal'인것도 좋다. 작가의 에고를 드러내기 위해 이미 완벽한 제목을 굳이 한번 뒤틀지 않는것도 생각보다 쉽진 않다.

 

 

- 아마도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들어낸 작품이겠지?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가진 라면봉지를 사용했지만, 반듯한 네모와 사선을 잘 섞어서 쓴게 마음에 든다. 까르보 불닭의 분홍색 봉지가 꽃나무와 연결되는 점도 좋다. 그치만 역시 순수한 낙서와 의무적인 과제간의 격차는 느껴지는듯한 작품.

 

 

-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MD샵이 나오는데, 한켠에 이렇게 직접 그림자놀이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어른이인 나는 쿨하게 지나쳤지만 어린아이들이라면 재밌어할듯. 근데 책상 높이는 어른에 맞춰진 것 같았다. 아이용 발받침대가 있던가... 기억이 나진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