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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공연관람 기록

[221204] 국립오페라단 '라보엠'

by eunryeong 2022. 12. 6.

- 고백하자면, 공연 보러 다니는거 좋아하고 돈도 많이 쓰지만 오페라를 보러 간 적은 최근 몇년간 한 번도 없었다. 클래식 중에서도 기악곡을 편애하고, 목소리가 들어간 곡들도 몇몇 합창곡 외에는 잘 듣지 않는데다가, 오페라 하면 불필요하게 모든 대사에 음정을 붙여버리는 곡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아무래도 후순위로 고려하게 된다. (물론 뮤지컬도 불필요하게 음정을 붙여버리는 극이라, 장르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다...라기엔 꽤나 뮤지컬을 많이 보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꽤 오랫동안 보고싶어서 찾아봤었고, 2020년 연말에 올뻔했던 것을 2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보게 된, 내게는 꽤나 사연있는 작품이다.

 

- 라 보엠을 보게 된 이유는 2020년에 공연되었던 뮤지컬 '렌트'의 원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이다. 조너던 라슨은 왜 이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았고, 어느 정도로 비슷한지, 그리고 무엇이 다른지. 덕후의 심정으로 꼭 이 오페라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오페라가 시작되었고, 생각보다 너무 유사한 장면들이 많아서 웃음을 풉 터트릴 정도로 전체적인 줄거리부터 작은 요소들 하나까지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시작할 때 난로에 원고뭉치를 집어넣는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서 미미를 외치는 로돌프의 하이노트 음정까지. 이 부분은 적자면 너무 길어질테니 나중에 따로 덕후의 마음으로 열심히 휘갈겨보려고 한다.

 

- 초반부터 등장하는 4명의 답없는(...) 친구들은 각자 작가(정확히는 시인), 화가, 음악가, 철학자로 보헤미안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인 군상들이 골고루 모였다. 살롱 문화로 다양한 지식인들이 교류했던 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네 바지유 르누아르처럼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들끼리 더 돈독하게 생활을 공유하는 경향이 큰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철없고 유쾌한 넷이 모여서 더 철없어지는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어보면 현학적인 단어로 겁나 유치하게 논다 진짜 ㅋㅋㅋ

 

- 2막 보고나서 정말 머릿속에 무제타!!! 무제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와 무제타 미친 스타성... 마르첼로를 먼저 차놓고는 눈 앞에 있는데 자기 무시하니까 참을 수 없어하고, 마르첼로를 꼬시려고 스커트자락을 훤히 들어올려 발목을!!! 길거리에서 발목(+종아리)를!!! 훤히 드러내버리는 저 용감무쌍한 여인네라니 ㅋㅋㅋㅋㅋ 아 진짜 마성의 매력. 저렇게 마르첼로를 꼬시는 와중에도 주변에 몇몇 남자 슬쩍 꼬시기도 하고 ㅋㅋㅋㅋ 식당 종업원이 마르첼로한테 반해서 정신 못차리고 있다가 주인? 종업원 선배?한테 등짝 맞는거 진짜 ㅋㅋㅋㅋㅋ 저 장면이 굉장히 복잡한 연말 상점가, 등장인물이 족히 사오십명은 되어보이는 장면인데 무제타 등장하면 그냥 무제타만 보인다. 아 정말 무제타 팬 될거 같아. 라슨이 렌트에서 모린의 그 길고 긴 오버 더 문 장면을 넣어준걸 보면 라슨의 최애도 무제타였음이 분명하다.

 

- 로돌프와 미미의 사랑은 저 시대 감성이지만, 그만큼 클래식이기도 하다. 너무나 사랑하는 두 연인이 너무나 돈이 없는, 가난한 현실 앞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진실된 마음을 인정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라는, 가슴 아픈 비극. 지금 시대에는 고루해보이겠지만 오페라가 제작된 당시에는 어쩌면 가장 진보된 방식의 사랑과 연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혈통으로 자신이 있을 자리가 정해지는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신분고하의 갈등은 있어도 경제력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았을테니.

 

- 무대가 어마어마어마어마했다. 프로그램북에서 무대 스케치를 보고 '오 돈 좀 들여서 멋진 무대를 만들었는걸?'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화려하고 디테일하면서 재밌는 요소가 가득 담긴 무대였다! 특히 2막에서 2층으로 된 카페 씬이랑, 양쪽에 있는 좁은 골목길들이 장면 장면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거기다가 이 장면에서 수많은 배우들이 쏟아져내리듯이 나와서, 북적북적한 크리스마스 날의 파리 거리 분위기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애기들이 장난감 장수를 보고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다가 엄마한테 혼나는 장면들도 귀여웠고 ㅋㅋㅋㅋ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위해 좁은 길을 지나다니는 장면도 재밌었고. 내가 눈이 여러개였다면!!! 아니면 공연 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요런 장면을 여러번 보면서 한장면 한장면 놓치지 않았을텐데!!! 그치만 다행히도 크리스마스 날에 네이버TV에서 영상중계가 있으니 꼭 이날 열심히 봐야겠다. 이거 보려고 집에서 올라오는 기차표도 날짜를 바꿨다. 국립오페라단 네이버TV 바로가기 (광고 아님 광고면 좋겠네요 저도) 

 

- 국립단체답게 프로그램북 퀄리티도 훌륭! 극에 대한 설명이 잘 들어가 있고, 의상과 무대 스케치 사진도 들어가있고, 심지어 주요한 넘버들의 주제마디 악보도 실려있다! 근데 5천원밖에 안해! 크기는 크지 않지만, 오히려 책장에 꽂아두기 좋은 크기다. 무엇보다 전체 대본이 원문과 한국어로 같이 실려있다! 이런 퀄리티의 프로그램북이라니, 역시 내가 낸 세금이 허투로 쓰이지 않고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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