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게 아마 과천 현대미술관 전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능경 작가의 '신문읽기'라는 작품은 그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유명한 작품들보다도 더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군사정권 시대의 서슬퍼런 언론검열을 효과적으로, 한편 너무 직설적이라 뒷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표현한 그의 퍼포먼스는 당시 딱 한번 보았음에도 결코 잊혀지지 않았고, 이번에 전시 소식을 듣고서 바로 그때의 그 작가임을 기억해냈다.
회화나 조각과 같이 결과물이 온전히 남는, 아니 결과물을 만드는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들과 달리 성능경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퍼포먼스 그 자체로 휘발되어 버리는 작품이다. 물론 그 퍼포먼스로 인해 남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 남는 것들을 만들기 위해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자체가 '작품'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이번 개인전 소식을 듣고 어떤 형태의 전시가 될까 굉장히 궁금했다. 다녀와 본 바로는, 역시 퍼포먼스를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의 끊임없는 예술행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감상에 도움이 될 기사를 따로 링크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길. 2023년 성능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1 / 2023년 성능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2
백아트 갤러리는 첫 방문이었는데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입간판이 힙하고 예뻤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서 한컷.
갤러리 공간은 굉장히 좁았고 예전 건물의 벽체를 중간중간 부수고 공간을 넓혀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듯 해서 정리가 덜 된 벽체공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또한 작가의 작품들과 잘 어울린다면 어울리는 모습. 1층에는 작가가 이전에 한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남겨둔 사진들이 많았다. 여러 작품들 중 가장 와닿았던 작품은 수축과 팽창이라는 제목의, 몸을 한껏 폈다가 접었다가 하는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아주 단순하지만, 그래서 가장 근원적인 움직임에 대한 고찰이라 더 와닿았나보다. 이날 본 무용도 그렇고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것들이긴 하다.
안쪽 공간에는 작가의 퍼포먼스에 사용하는 소품들과 퍼포먼스 후 남은 잔해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채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 영상도 흘러나왔는데 편하게 볼만한 장소는 아니어서 조금 보다가 나왔다. 여기 마당도 꽤 넓고 길이랑 거리도 좀 있는데 날씨 좋은 날 마당에 틀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2층에는 보다 다양한 작품들이 보였다. 작가의 퍼포먼스 후 남은 흔적이라는 은박지가 1층, 2층 전시장 곳곳에 보였고, 컬러사진들과 흑백사진들 그리고 영상이 흘러나오는 TV까지. 첫 사진 전면에 보이는 백두산이라는 작품은 집에서 마시던 생수병을 가만히 보다가 작품이 될 것 같아 빈 페트병을 모아두었고, 이것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초록색 라벨이 붙은 부분을 산 모양으로 뜯어낸 모양새인듯 한데(진짜 백두산의 산세와 닮았는지는 모르겠다) 오 기발한데? 하고 생각했다. 작품 하나를 만들고 운송하는 데에도 자원낭비가 어마어마한데, 이렇게 리사이클링을 통해 작품을 만든다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그날 그날 영어. 언뜻 보면 참 별거 아닌것 같은 이 한장 한장의 메모들이, 한 나이든 예술인이 새로운(물론 학창시절때부터 배워오던 것이니 완전히 새로운 영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배움을 향해 하루 하루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의 꾸준함과 실천력이 인상깊었고, 무엇보다 전시의 타이틀인 '예술 행각'을 잘 보여주는 작품(혹은 아카이브)가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예술가라는 직업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 자신이 남기는 모든 흔적이 예술이라는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신기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직업군이 아닐까 싶었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을 잠시 인용해본다. 이 작업은 동아일보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 실리는 'english review'를 읽고 풀어보려는 일로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 늙은이 별로 하는 일 없이 때를 보내는 예술질이 되었고 이것도 배움이니 배움질이 되었으며 그러다보니 내가 예술질하는 사람임을 밝히는 예술이 되었다.
2층에 있는 다른 작품들. 사진에 선 혹은 화살표가 그려진 작품은 현장 3, 현장40이라는 작품들인데 리플렛을 읽어보니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을 다시 사진기로 찍어 선이나 화살표로 표시한 작품이라고 한다. 신문에 이런 저런 기사들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이 사진들 중, 다시 작가의 의도에 맞춰 선택되고 (다시 사진이라는 형태로 돌아가) 재생산되어 선이 그어지는 모습을 통해 언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선언이 담긴 작품으로 보였다. 작가가 작품을 발표하던 1980년대에는 신문과 TV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고 그들의 이야기에 다시 내 의견을 덧붙이는 것 조차도 쉽지않은 (그리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도 한) 시기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몇몇의 대형 신문사와 방송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닌 개인 유튜버 혹은 스트리머가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신문기사든 책이든 누군가의 글이든 너무 쉽게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고 편집하고 가공할 수 있는 시대. 이 블로그에 글을 쓰는 나조차도 또 하나의 편집과 가공을 덧붙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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