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많은 번화가가 있다. '시내'라고 하면 당연히 동성로를 떠올리는 대구출신인 나에게는 다양한 번화가와 만남의 장소가 있는 서울이 처음에는 복잡하고 정신없게 느껴졌다. 광화문, 종로, 강남, 홍대, 이태원, 왕십리, 잠실, 압구정 등등 각자의 생활권에 따라 선호하는 장소가 판이하게 달랐고, 각각의 장소는 공통적인 유희시설(극장, 쇼핑몰, 다양한 종류의 맛집 등)과 각기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종로권이지만, 종각과 교보문고, 종로타워가 있는 종로 1가와 탑골공원, 낙원상가가 있는 종로 3가의 분위기만 보아도 서울의 도심지가 지닌 각각의 개성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이 많은 번화가들 중 서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서울의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고르라면 가장 먼저 명동이 떠오른다. 가장 좋아하는 곳도, 가장 자주 가는 곳도 아니지만 왠지 당연하게 명동은 서울의 중심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의 주요 백화점 브랜드 두 곳의 본점이 위치해서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종교시설이 위치해서일까? 혹은, 단순히 번화가들 중 가장 길이 널찍널찍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어느쪽이건 간에,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명동은 서울의 얼굴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외국에서는 한국하면 명동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명동에 있는 극장을 찾아가려고 한두달에 한번 정도는 명동을 찾았었는데, 매번 갈 때마다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많이 들리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여행온 사람들과 뒤섞여 거리를 걷고 있다 보면, 나 역시 여행을 온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행의 의미를 조금 넓게 본다면, 몇 시간동안 원래의 생활권을 떠나 명동까지 온 것도 여행이라고 부를 만 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극장에서 연극공연을 보기도 하는 등, 여행에서 하는 것과 전혀 다름없는 행동을 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여행자들이 북적대는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설레는 느낌을 주었다.
오늘 저녁, 오랜만에 명동을 다시 찾았다. 코로나로 인해 명동의 극장은 오랫동안 공연을 하지 않았었고, 나 또한 역병을 조심하느라 불필요하게 번화가를 방문하는 일은 피하다 보니 거진 일년 넘게 명동에 올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명동은 아주 한적했다. 집 근처에 위치한 번화가는 여전히 북적대고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명동은 빈 상가도 많았고 거리에 사람들도 번화가라기에는 부족한 인원수가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명동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던 포장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 중간을 멋대로 점령하고 통행을 방해하는 포장마차가 답답했었지만, 막상 사라진 모습을 보니 거리의 활기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행이 사라진 2020년과 2021년을 명동의 현실에서 보게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고, 백신 소식은 들리지만 전 국민 접종은 아직 요원하고, 이러한 펜데믹이 앞으로 주기적으로 올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람들의 거리는 더욱 더 멀어질 것이고, 모두들 본인의 생활반경 내에서 움직이려 할 것이고, 여행은 점점 가상현실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 생활권과도 거리가 먼 서울의 대표적인 중심지 '명동'은 누구도 찾지 않는 쇠락하는 지역이 되어가는걸까.
- 2021. 3.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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