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3] 미구엘 바르셀로 : 그리자유: 빛의 연회장

2023. 3. 25. 09:49Diary/전시 리뷰

    오랜만에 굉장히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보고 왔다. 생각해보면 최근에 많이 본 작품들은 개념의 탐구 혹은 추상적인, 근원적인 등등의 이유로 좀 더 정적인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 공간에 들어와 작품 앞에 선 순간 거침없이 내려간 붓놀림에 압도되어서 한참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착각일수도) 전시명의 '그리자유(grisaille)'는 회화 기법 중 하나로, 단색조의 색상 위에 얇은 색상의 층을 켜켜이 쌓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캔버스를 지배하는 메인 색상이 있고 흑, 백, 간혹 한두개의 다른 색상으로 형체를 나타내는데 이렇게 적은 색상으로도 굉장히 다채로운 느낌을 준다. 

 

 

1, 2 - 와인빛의 엔사바나도. 사진으로는 와인빛 느낌이 덜한데, 실제로 보면 그림 전체가 적포도주 색깔이다. 엔사바나도를 찾아보니 소의 머리와 다리는 검고 다른 부분은 하얀-이라는데, 스페인에서는 이런 소를 좋아하는건가? 암튼 등을 덮은 하얀 색이 거칠고도 거침없이 칠해져 있다.  소의 등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같은 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하고. 소 등에 세로로 그어놓은 선은 소를 고기부위별로 나누어둔 것인지(이런 생각부터 나는 나라는 사람은...) 이것 또한 궁금하다.

3, 4 - 생일 케이크와 정물화. 작가의 말에 따르면, 퇴색하는 그리자유 붉은 보라색이 되다 또한 좋은 제목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멈춰있는 사물들이지만 이상하게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금방이라도 팔딱댈듯한 물고기와 잎파리가 팔랑거리는 것 같은 대파단이 눈에 들어온다. 저것을 대파단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정물화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겠지? 왼편 아래에 있는 거무스름한 형체는 개인것 같은데, 유일하게 (아마도) 생명을 가진 존재가 이 그림에서는 혼자 까만색으로만 그려진다는 것도 재밌네. 아니면 그냥 까만 개인가.

5, 6 - 달아나는 개를 그린 유색 회화. 이 그림 속에는 (다른 그림에는 잘만 보이는) 개도 없고, 달아나거나 심지어 살아있는 무언가도 없고, 유색이라고 부를만한 색채도 없다. 그림 속에서 머리-다리(혹은 꼬리)의 위아래가 명확한 것들은 모두 거꾸로 뒤집혀져 있어 모든게 죽어있는 듯 하다. 작가 본인도 '이것은 색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붙인 제목 같은데, 관람자들에게 아무것도 이야기 하고싶지 않아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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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플랑드르 정물화. 정물의 단골 소재들인 동그란 과일, 주전자, 꽃병 등도 있지만 거꾸로 매달린 동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의 사슴이 취한 포즈가 너무 신기해서(사슴아 미안해...) 또 한참을 보았던 듯. 이 그림은 바탕이 녹색빛을 띄는 하늘색인데(혹은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감이 겹쳐지고 또 겹쳐지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민낯의 캔버스가 훤히 드러나는 성의없(어보이)는 채색이 또 인상적이다.

2 - 물고기 일곱마리와 레몬 세 개. 처음 작품과 제목을 비교해보고 다들 물고기가 왜 세마리야?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세 마리는 반으로 잘려진 상태라고 한다. 아마도 꼬리만 나와있는 친구들이겠지? 쉽게 몇마리인지 세어보고 싶다면 물고기 머리쪽이 몇 개인지를 보면 된다. 이 그림이 이상해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릇 속에 담긴 물고기들이 길이로 보면 족히 한마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크기여서인데, 아마도 그릇 바깥쪽에 간신이 얼굴이 캔버스에 담긴 친구들이 얼굴과 몸통이 분리된 녀석들이 아닐까 싶다. 캔버스 밖으로는 온전히 이어진 형태가 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사고체계를 살짝 비틀려고 한 것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저 제목은 필경 오병이어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3, 4 - 노란 정물화. 오른쪽 상단의 해골은 바다코끼리의 해골이구나.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황소 - 바다코끼리 - 문어의 대화라고 이야기했는데, 옆에 있는 물고기가 좀 섭섭해 할 것 같다.

5, 6 - 작은 동물. 테이블 위에 늘어진 뼈와 내장들은 하나의 인간으로부터 나옴직한 크기와 구성인듯. 오른편의 개가 탁자 아래에서 목을 길게 빼고 냄새를 맡고 있는데, 그 대상이 되는 네모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알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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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 잿빛 황소. 작업실에서 수집한 모든 것들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주세페 아르침볼도 혹은 프랑켄슈타인의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림 중앙에 떡하니 보이는 동그란 머리의 저 것은 문어가 틀림없는 듯 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감이 캔버스 위에 두텁게 발려 있어서, 이거 100년이 지나도 물감에 손을 대면 말랑말랑하겠는데? 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3 - 하보네로. 스페인어로 '(황소 가죽이) 옅은 황색인' 것을 가리키는 형용사라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 황소에 진심이구나. 초록 위에 씌워진 황토색이 이 소의 가죽 색상을 나타내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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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원 1. 갈매기의 니나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 사자, 독수리, 뇌조, 뿔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 속의 말없는 물고기,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 한마디로 모든 생명, 모든 생물.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든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