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공연관람 기록

[230208] 프로젝트집단 세사람 <노스체(NOSCE)> - 2022 창작산실

eunryeong 2023. 2. 12. 12:09

- 창작산실 공연을 몇년만에 다시 보았다. 이전에 본 작품에서 꽤 크게 실망을 해서 한동안 열심히 피했는데, 그 후 몇년간 공연을 계속 보면서 여기저기서 워낙 실망을 많이 하게 된 터라(잠시 눈물을 닦아본다...) 그때의 실패 경험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고, 극에 대한 추천글도 눈에 들어왔고, 시놉시스도 꽤 재밌어보이고 해서 한번 도전해 본 작품.

 

- 시놉시스를 간략하게 옮겨보자면, 원전 폭발이 발생한지 수십 년 후, 폭발지가 관광지로 조성될 만큼 시간이 흐른 어느 때. 사고 중심지로부터 수십 km 떨어진 마을, 소수의 사람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이곳에 어느 날 재난 로봇 노스체가 들어온다. 디스토피아 SF물같은 설명이지만 실제 극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조금 다르다. 소수자들의 공동체, 이들에 대한 외부의 차별어린 시선, 인간적인 휴머노이드에게 갖게 되는 감정, 가족과 모성애에 대한 고찰 등등.

 

- 현과 희는 고립된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로의 신체적인 조건은 서로 다르다. 또 그만큼 서로 사회적, 신체적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옥은 스테레오 타입의 한국(어쩌면 전세계적으로 통용될법한) 할머니이자 극중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는 조정자이기도 하다. 필은 이 마을과 관계가 없는, 그렇기에 나이브하게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철저한 외부자, 연은 고립된 마을을 등지고 내부에서 외부로 나간 경계인. 그리고 인간이 아닌 로봇, 노스체. 등장인물 한명 한명에게 각자의 시선과 입장을 부여하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도록 만든 극. 굉장히 영리하게 극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소재와 주제때문에 다소 무거워질 수 있는 스토리를 노스체라는 로봇을 통해 중간중간 유쾌하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데, 노스체의 회로 속에서 일어나는 연산작용을 무대에 놓여진 화면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피식 하고 웃게 만든다. 노스체가 처음 접하는 단어에 대한 정의, 노스체의 돌발 행동에 대한 알고리즘, 노스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상황에 대한 나름의 질문 등.

 

-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장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현은 보청기를 껴야만 주변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데, 극 중 현 혼자 무대에 나와 조용히 무대 앞쪽에 앉아 보청기를 벗고 조용히 앉아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둔탁해졌고 마치 물 속에 있는듯한 먹먹함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연이 따라나와 현의 옆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 또한 현에게(그리고 관객들에게) 웅얼거림으로만 들렸을 뿐. 얼마 후 현이 다시 보청기를 끼자, 그제서야 모든 소리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연출이 인상적이었던건 현의 시점을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놀라움도 있지만, 극 초반부터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공하고 있기에 이러한 먹먹한 소리가 나옴에도 관객들이 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관객들에게 장애인들을 위한 자막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만드는 연출으로 볼 수 있을것 같다. 사실 이 부분이 지나가듯이 나오는 장면이라 극을 볼 때는 오 재밌는 장치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후기를 적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걸 보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이었나보다.

 

- 무대 구성은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싶은 잡동사니들의 집합체였는데, 극을 보면서 느낀건 실제 극중 인물들의 삶을 너무 잔해더미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원전 사고가 있었던 지역이고 이에 새로운 문물들로 크게 발전을 하지 못한건 맞지만, 멧돼지들을 막아내는 방벽의 허술함과 뒷편 가구들의 조잡함이 더해져서 그런지 그저 건물도 없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로 보였다. 헌터헌터의 유성가 같은 설정을 너무 많이 접한 내 죄인가...

 

- 노스체 역할을 맡은 최희진 배우의 로봇연기가 굉장히 자연스럽고 인상적이다. 극을 보는 내내 느낀게, 로봇을 연기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연기하는 로봇으로서의 움직임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김은희 배우는 이전에 본 작품과 180도 다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이런게 연기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른 인상적인 배우는 연을 연기한 박윤정 배우. 딱히 이유를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그냥 배우에게 눈이 가고 대사가 귀에 들어온다. 이런게 무섭지 무서워. 다음 작품은 어떨까 궁금해서 챙겨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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