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공연관람 기록

[230217] 연극집단 반 <미궁(迷宮)의 설계자> - 2022 창작산실

eunryeong 2023. 2. 19. 14:46

- 3개의 시간축이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건물을 설계하는 1975년, 건물이 본래의 용도로 사용되는 1986년, 제 기능을 잃은 건물이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2020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3명의 인물은 각자의 인생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건물의 생애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화자로서 의도적으로 선정된 것이기도 하다.

 

- 아마도 그래서였을것 같지만, 나은의 이야기는 유독 겉돈다는 인상이 강했다. 현대 시점에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던지는 역할로 선택된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초반에는 중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경하게 건축가를 변호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건축가에게 비난을 던지는 데 그 심경의 변화가 어디서 비롯된건지 사실 잘 공감이 가지 않았다. 최소한 안내자에게 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시잖아요 라며 빈정거림을 담은 무시를 하지 않던가(이건 복선을 위해 의도적으로 넣은것 같긴 하지만), 대화할 때 톤을 좀 낮고 부드럽게 한다든가(이것도 소위 '중립'이라는 사람들의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한 것 같긴 하지만...) 했다면 좀 더 공감이 갔을텐데.

 

-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중간 중간에 아이가 등장해서 한마디씩 툭 던지고 가는데 이야기 전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극에서 그나마 의미있던 부분이라면 대공분실 공간을 테이프로 죽 붙여서 만드는 장면, 그거 말고는 크게 와닿지는 않던데. 벽돌로 담을 쌓는 부분들은 뭔가 늘어진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라...

 

- 등장인물들의 설정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각본은 좋았다. 3개의 시간축을 하나의 무대에서 교차시키면서도 어색하지 않았고, 건축가 신호와 다큐멘터리 작가 나은의 이야기, 질문, 변명과 회피가 티키타카되면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다만 중후반부에서 조금 늘어지나? 싶긴 했는데, 신호의 시덥잖은 자기변명과 적반하장의 태도를 계속 보고있으려니 약간 지루했달까... 역시 알맹이 없는 말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듯. (여기서 '알맹이 없는 말'은 신호라는 인물이 취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것일 뿐, 작가의 필력이랑은 관계없습니다)

 

-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후반부에서 어라? 하고 살짝 튀는 인물을 보고 미리 짐작하긴 했다. 뭐 반전극은 아니라 짐작을 해도 극을 이해하는 데 문제 없지만. 극의 전반부와 중반부에서 안내원이 취하는 과할 정도의 감정적인 태도가 극을 보고나면 더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 

 

- 이 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대와 연출. 극의 주인공인 대공분실의 가장 아이코닉한 디테일인 좁고 긴 창문들이 양각으로 표현된 하얗고 너른 판때기가 전면에, 대공분실의 또 다른 디테일인 확장되는 사각형의 입구가 표현된 판때기가 왼편에, 또 다른 좁고 긴 창문 하나가 크게 표현된 판때기가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각 벽에는 프로젝터를 통해 스토리가 진행되는 배경을 비춰주는데, 왼편과 중앙은 대공분실인데 오른편은 공간 사옥의 건축사무실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공분실의 창문과 공간 사옥의 창문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걸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함.

 

- 연출에서 또 다른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대공분실의 좁은 방과 욕조를 즉석에서 테이프를 붙여 표현하는 것이다. '1.5평의 방'이라고 말로 듣는것과, 실제로 그 방이 차지하는 면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다. 이 방을 실제로 가서 보게 된다면 그것 또한 다르게 다가오겠지. 중간중간 한 배우가 경수가 당하는 장면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는 것도 기억나는데, 처음에 촬영한 영상은 벽면에 직접 쏘아서 보여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냥 영상만 찍는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다. 내가 못찾은건가? 

 

- 이 극이 올라온 아르코 예술극장 또한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곳으로, 벽돌로 지어진 건물 내에는 원형 계단이 놓여있다. 이 원형계단은 평소에는 개방되지 않는 곳이라 공연장을 찾을 때에는 이용할 수 없다. 나 또한 보다 넓고, 타원형의 동선을 따라 층과 층을 파악하며 이동할 수 있는 메인 계단을 통해 공연장을 찾았고, 극장의 안내에 따라 퇴장할 때 좁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형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아마 이 원형계단을 이용하는 사람 누구도 이 계단이 사용자 친화적인, '휴먼 스케일'을 고려한 것이라고는 절대 이야기 할 수 없으리라.

 

- 극에서 던지는 질문(이미 극 속에서 답을 낸 질문이지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건축가들이 건물을 지을 때 고려하는 것들 중 리듬감이라는 것이 있다. 항상 넓고 환하기만 한 공간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듯, 의도적인 불편함과 다름을 집어넣음으로서 공간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고 이용자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의 일부 요소에서 폐쇄적이고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종국에는 이를 해소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잘 만든 건축물에서 마지막 요소만 빼버린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자를 짓누르는 건축물이 될 수 있다는 것.

    김수근(혹은 그의 사무실에서 일한 사람들)이 이 건축물을 지을 때 과연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를 모르고 지었을까? 그랬을리가. 이 건물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하나 이용자들을 효과적으로 짓누르고 관리하기 위해 디테일 하나 하나를 고르고 골라 만든 결과물이다. 이런 건물을 지어놓고,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건 말도 안되는 짓이지. 정권의 억압때문에 억지로 지은걸까?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디테일을 짜넣진 않았어야지.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라는걸 몰랐을까? 건축주의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이런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두고도 설계도면에 이름 하나 적지 않는걸 보면 글쎄요. 

 

-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좋았기 때문에 딱히 첨언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연기력?과는 별개로, 높은 분의 의견을 전하는 경상도 말투의 인물이 너무 현실적인 그 나이대 경상도 사람이라 흠칫 놀랐습니다. 부산도 경남도 경북도 아닌, 대구 말투 그 잡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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