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공연관람 기록

[230303] 국립무용단 <더 룸>

eunryeong 2023. 3. 4. 08:11

- 국립무용단의 공연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만, 국립극장 라인업에서 이번 공연에 대한 설명을 보고 별 고민없이 바로 예매했다. 5년만에 돌아오는 작품, 김설진 안무, 각 무용수들의 의견과 특성을 반영하여 안무를 구성 등등.

 

- 무대는 직육면체에서 마주보는 한 면씩 덜어낸 모양으로 생겼다. 비스듬하게 관객을 향하는 크지 않은 방 위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펼쳐진다. 초반에 방 한켠에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거는 장면이 있는데, 공연을 보고 있자면 눈 앞에서 보여지는 이 공연 자체가 살바도르 달리의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8명의 무용수가 등장했다가, 퇴장했다가, 혹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서로 움직임을 주고받다가, 혹은 무시하다가, 아니면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 행동하다가.

 

- 그렇기에 관객들은 마음을 열고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닫고 혼란스럽게 지켜볼 수도 있다. 대체 여기에서 왜? 저런 움직임이? 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마 이 작품에 대해 영영 이해할 수 없겠지 아마. 그래서 내가 오늘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던게 아닐까 싶다. 전후관계, 명확한 인과, 논리적인 귀결. 내 성향이 그렇게 생겨먹은것을 어찌하리오.

 

- 공연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거슬리는 지점, 탁 하고 끊어지는 절단을 넣어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샐러리맨이 방에 들어온 후 갑자기 불이 탁 켜지면서 무대가 환해지는 장면이다. 요안 부르주아의 '기울어진 사람들' 후기에서 이와 유사한 장치가 있었는데 이 무대에서도 보게 되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도 이런 절단의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의도한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이건.

 

- 무용작품인 만큼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달리의 그림을 표현한 부분들도 있었는데, 몸을 사정없이 뒤집어대면서 현실 세계가 아닌 판타지 세계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할법한 몸짓을 보여준다거나, 혹은 움직임을 아예 멈춰 딱딱하게 굳어버린 신체를 연기한다거나. 또는 누군가에게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거나. (시간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제일 처음에 적었던 움직임은 그저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르는 누군가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다) 

 

-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은 무대 위에서 한복 무용의상을 몇겹씩 입히는 장면들. 이런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의상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장면은 어떤 흐름인지 이해가 될것 같은데, 왜 굳이 무대 위에서 입혀야만 했을까? 공연 전반적으로 무용의 형식?이 아닌 잡다한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간신히 붙잡고 있던 집중력이 이 부분에서 많이 흐트러졌다. 

 

- 도어락 비번을 누를 때 나는 짧고 경쾌한 전자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바이탈 사인의 간격으로 변하고, 마지막은 삐-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데 무엇을 의도한건지 궁금하다. 사실 혼자 추리해낸 내용은 있다만, 이후 이어지는 동작들을 보니 내 추리는 모두 빗나간 듯 하고.

 

- 무대가 마지막에 빙그르르 회전하고, 열린 창문들을 통해 건물 바깥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딱 한번 사용된다는 것은 아쉽지만 재밌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후반부에 딱 한번만 사용하는 거겠지 아마. 최소한 내겐 이 장치가 꽤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게 2016년 신시컴퍼니의 햄릿 말고는 없었던 것 같은데, 둘 다 국립극장에서 본 공연이라는 점도 꽤 재밌는 점인듯.

 

- 누군가를 강렬하게 끌어안은 상태로 프리징된 사람과, 허그로부터 벗어나 프리징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른 사람. 이들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의 기억? 아니면 지금의 매너리즘? 미련? 무관심?

 

- 이 극의 리플릿은 정사각형의 손바닥 크기 책자인데, 한 부분을 칼로 잘라서 사각형 룸 모양의 입체로 만들수가 있다. 간단한 작업으로 공연의 특징을 살린 기념품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는게 꽤나 재있고 기발한 아이디어! 그치만 공연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게 담겨있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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