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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댄서 by 라스 폰 트리에 (2001)

eunryeong 2022. 11. 20. 13:42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는 두 번 보기는 힘들다. 기괴하지만 현실적이고, 담담하지만 절망적이다. 이 간극에서 오는 무력감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뿌리부터 잡아채 흔들어버린다. 어둠속의 댄서는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이 실낱같이 존재하지만, 예전에 왓챠에 적었던 한줄평처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친절하게 멘붕으로 인도하는 영화"일 뿐. 작중 화자의 구원 없는 종말로 종결되는 서사구조는 다른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뮤지컬 영화이나 뮤지컬의 화려한 쇼도, 기깔나는 넘버도 없는 이유는 그 뮤지컬은 오직 여주인공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세상은 잿빛 현실을 아주 약간 탈피했을 뿐,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조명이나 멋진 쇼댄서들을 데리고 올 수는 없다. 그녀의 진짜 삶에도 뮤지컬이 있지만 눈이 어두침침한 그녀에게는 그 작은 자리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현실을 뮤지컬로 만드는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지만, 그 마음아픈 감동마저도 온전하게 허용하지 않는 마무리에서 감독의 꼬일대로 꼬인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슬프고 아름다운 이 영화는 아주 오랫동안 내 취향의 리스트 첫 머리에 올라있었다. 한국에서 DVD를 구하기 어려웠던 때, 미국여행 다녀온 동아리 선배가 이 영화의 DVD를 구해다 내게 선물로 주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마무리가 찝찝한 건 영화 안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뷔욕이 폭로한 라스 폰 트리에의 못된 짓들은, 이제 이 영화를 보는것마저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생각되는 영화이긴 하지만, 내 취향을 이야기하는 데 이 영화를 빼놓을 수는 없기에 간단하게 적어본다.

    덧. I've seen it all은 톰 요크와 부른 버전이 조금 더 좋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