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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의 날개, 함정과 진자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

eunryeong 2023. 1. 18. 00:14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는 내 인생에서 꽤 의미있는 작품 중 하나. 이전까지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보지 않다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뮤지컬 공연도 조금씩 챙겨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다른 장르의 공연은 주기적으로 보았지만 이상하게 뮤지컬만큼은 쉽사리 내키지 않았었고, 그 벽을 부숴준 것은 이 뮤지컬에 수록된 아주 기깔난 넘버들이었다.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던 '매의 날개' 넘버는 나를 뮤지컬 공연장으로 끌어당겼고, 이 외에도 일렉기타 소리가 들어간 많은 넘버들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아쉽게도 내가 본 시점은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다시 보러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이 없어진 극이지만 그래도 이 넘버만큼은 꼭 다시 듣고싶다 하는 2곡을 골라보았다. 사실 넘버는 훌륭했지만 극 전체 서사는 조금... 애매한... 그런 극이라, 이 넘버들만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상관없긴 하다. 성수감독님 콘서트 다시 어떻게 좀...

 

# 매의 날개

    이 노래 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 초연을 마친 후 콘서트에서 포 역할을 맡은 3명의 배우가 함께 이 곡을 불렀는데, 후반부 클라이막스 부분을 묘하게 서로 미루던 그 광경. 초연때 이 역할을 맡은 마이클 리, 김동완, 최재림 세 명 모두 좋은 배우들이고 가창력도 훌륭하지만 그만큼 이 곡의 고음은 소화하기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 이 때문인지 초연에서 포우 역할을 했던 3명 모두 재연에서는 다시 볼 수 없었지만...

    여튼, 매의 날개를 부른 많은 버전들이 있지만 나를 뮤지컬 공연장으로 이끈 것은 최재림씨의 노래였다. 가장 처음 공개된 연습영상과 프레스콜이 최재림씨 버전이기도 했지만, 단단하고 시원하게 쭉 뻗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최재림씨를 보는 것 자체가 굉장한 쾌감이었다. 이후 재연 삼연까지 거치기도 했고, 심지어 영국 프로덕션 버전의 매의 날개도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최재림씨의 버전이 가장 좋다. 반대로, 최재림씨가 공연한 많은 뮤지컬을 봐왔지만 그 중 매의 날개만큼 뮤지컬 취향 적격인 넘버 또한 없었다. 얼마전 인터뷰를 보니 최재림도 자신의 인생곡으로 매의 날개를 꼽았던데, 이 곡을 들을 기회가 좀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 역시 답은 성수음감님 콘서트 뿐...!

 

# 함정과 진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은 평범하지 않다. 오래 전 출판된 그의 전집 '우울과 몽상'에서는 그의 작품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었다. 과학적 사실 몇 가지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끊임없이 펼쳐 나가는 환상, 당시 시대상을 시니컬하게 그려낸 풍자, 독자와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극대화한 추리,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 본연의 이야기를 그대로 그려낸듯한 공포. '함정과 진자'는 이 분류들 중 골라보자면 공포 카테고리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포가 그리는 공포는 결코 직관적이지 않다. 눈 앞에 보이는 귀신이나 살인마, 위험한 동물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심장이 죄어올만한 상황을 그려내고, 서서히 누군가의 정신을 좀먹어 갈 뿐.

    '함정과 진자'라는 곡은 이 소설의 서사와 텐션을 완벽하게 반영한 곡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팬이던 나를 뮤지컬 관람으로 이끈 것이 '매의 날개'라면, 이 곡을 통해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듯 하다. 재밌는 건 이 곡의 구성이 정통 뮤지컬 넘버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 벌스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낮고 규칙적인 베이스 음은 심장박동을 표현하는 듯 하고, 2절 이후 나오는 간주는 점점 미쳐가는 화자의 정신세계가 연상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다시 정신을 다잡고 거칠게 이겨내리라 다짐하는 해피엔딩(?)의 서사까지. 

    이 곡의 유달리 완벽한 서사구조때문에 역설적으로 콘서트에서 이 곡을 소화하기는 꽤 어려운 넘버이기도 하다. 위에 나오는 간주 부분은 연주자의 역량이 아주 중요한데 비해, 가창자는 무대에서 조금 뻘쭘해질 수 있는 파트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냥 바람을 가져볼 수는 있는거니까. 언젠가 이 곡도 꼭 라이브로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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