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이것저것

폴 그래햄의 아주 투박하고 단순한 홈페이지

eunryeong 2022. 12. 15. 18:04

    또 불치병이 돌아왔다. 괜찮아보이는 새로운 툴은 무작정 사용해보기 병. 오늘 메일함에서 Readwise에서 새로 내놓은 인터넷 아카이빙 & 리딩 툴인 Reader이 베타 오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가입하고 기능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툴을 Keep Productive나 Shu Omi가 한번 소개했던 것 같은데, 깔끔한 디자인에 심플한 기능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땐 클로즈 베타 단계라 아직 내가 써볼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툴을 써볼 기회가 주어졌기에,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내 기사 스크랩들을 이제야말로 한 곳에 싹 모으리!! 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동안 써왔던 서비스들을 연동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던 Pocket은 ReadWise랑 연동이 되어있었는지 알아서 보관함에 있던 글이 Reader로 들어왔다. Raindrop에 있는 글도 하나씩 수기로(...) Reader로 옮기고 있지만 아직 작업을 마치려면 시간은 좀 걸릴듯 하다.

 

    기사들을 옮기면서 예전에 내가 이런 컨텐츠에 관심이 있었구나, 이런 기사들을 스크랩했구나 하는걸 다시 한번씩 보게 된다. 무려 2013년에 비트코인이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를 스크랩했던 것도 찾아냈고(그때 비트코인 한두개만 사놨어도... ㅎㅎㅎㅎㅎ) lookbook이랑 design seed에서 온갖 레퍼런스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둔 것도 찾았다. 10년 전 기사의 예측을 읽으며 현실화된 것들, 실제로는 다가오지 않은 것들,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온 것 등을 구분해가며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고 믿으며 시간을 알차게 낭비하던 찰나,

 

    폴 그래햄의 글을 하나 스크랩 해두었던 것을 발견했다.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엑셀러레이터, 에어비앤비와 드롭박스에 투자하고 지금도 와이콤비네이터를 통해 수많은 IT 스타트업의 커뮤니티 생태계를 구축하는 인물. 이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가 자신의 글을 올리는 곳은 2000년대 초반 나모 웹에디터로 만들었을법한, 아주 투박하고 단순한 홈페이지였다. 딱히 디자인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아마 지금 나도 나모웹에디터가 있다면(html을 직접 짤수는 없기에 나모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금방 만들 수 있을법한 홈페이지였다. 거기에는 그동안 하나씩 써온 에세이들, 그가 몸담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들, FAQs와 RAQs(Rarely Asked Questions), 아마도 그가 영감을 받았을 Quotes까지. 많은 양의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지만 어느 하나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것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멈춘 홈페이지도 아니다. 내가 스크랩한 글은 2022년 9월에 작성된 글이고, 그 이후에도 3편의 글이 더 올라와있었다.

 

    이 홈페이지를 본 순간, 심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툴이 중요한 순간도 분명히 있다. 보다 효율적인 툴을 사용해서 더 좋은 성과를 얻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좋은 툴을 하나 발견하면 그 툴에 매몰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툴을 완벽하게 세팅하고 하나의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거기에 쌓아둔 컨텐츠는 그냥 잊혀진 채 계속 쌓이기만 했다. 마치 책장에서 아무렇게나 꽂힌 채 잊혀져있다 책장정리를 할 때에나 발굴되곤 하는 수많은 책들처럼. 하나의 예쁘고 완벽한 시스템에 천착하느라 수없이 툴을 갈아엎는게 일상이었고 블로그도 몇번을 갈아엎었다가 시작했다가를 반복했던 지난날들.

 

    꾸준히 쌓아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방법을 찾아나갔지만, 결국 내가 실제로 한건 그냥 매번 뒤엎기였다. 그 와중에 오늘 본 폴 그래햄의 홈페이지는 훌륭한 디자인도, 잘 짜여진 툴도 없지만 자기 자신만의 훌륭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훌륭한 결과는 완벽한 방법을 통해서 나오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이미 머리로는 잘 알고 있던 사실을, 아주 극단적인 예시를 통해 접하고 나니 뼈가 산산조각날 정도로 때려맞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 당장 시작해야한다. 또 어영부영하다가는 또 불치병이 도질테니.

 

    당장 할 일 - 레인드롭에 있는 기사들을 옮겨오려 노력하지 말 것. 그대로 놔두고 특정 키워드의 정보가 필요할 때에 검색으로 기사를 옮겨올 것. 뉴스레터를 반으로 줄일 것. 책을 읽을 것. 인풋 시간을 줄이고 퀄리티는 높일것. 일주일에 하나씩은 생산성, 혹은 인사이트 관련 글을 적을것. 블로그 중간에 폭파하고 갈아엎지 말 것. 글 지우지 말 것. 완벽한 템플릿에 집착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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