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공연관람 기록

[221026] 연극 '세인트 조앤'

eunryeong 2022. 10. 28. 12:24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라서, 일단 생각나는대로 막 적어두려고 함.

 

- 조지 버나드 쇼 하면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묘비명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작품이 올라온다고 해서 굉장히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이 극 또한 시니컬했는데, 성인으로 추대된 조앤을 둘러싼 인간들의 각기 이해관계들을 보면 참 실소가 나온다. 다른건 차치하고서라도, 그 어린 소녀를 막무가내로 화형장으로 끌고가는건 정말 못할 짓이었어.

 

- 최근에 본 연극 중에서 이렇게 의상을 해당 시대에 맞게 고증한 극이 오랜만인듯 해서 굉장히 반가웠음. 에필로그 장면에서 시대에 맞는 옷차림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게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반면 무대는 아주 미니멀하게, 아주 길고 단단한 무릎 높이의 단상을 움직여가며 서로 다른 공간을 표현해낸다. 최대한 단순하게 무대를 구성하려다보니, 막상 여기가 어딘가 싶은 공간도 있었음. 앞뒤 장면과의 단절만을 의도한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고, 실제로 어느 공간인지 보여주려고 했다면 그 부분에서는 효과적이진 않았던 듯(이라고 알못이 슬쩍 의견을 표합니다).

 

- 극 초반에 조앤이 샤를을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모두 프랑스어를 하잖아요'라는 대사가 나와 깜짝 놀랐음. 내 선입견 속의 잔 다르크는 중세시대, 종교가 모든 생활을 지배하던 때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기치를 앞세우고 행동하던 인물이었는데, 저 대사를 통해 하나의 프랑스라는 민족주의적인 기치를 내걸고 영국과 싸운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봉건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왕, 수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민족이라는 큰 덩어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알력싸움이 이 극의 중심 갈등소재인걸 보니, 작가가 본 조앤은 종교적인 상징성을 띈 성인이 아닌, 국가의 정체성을 부각시킨 프랑스인이구나 싶었다. (덧-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 신화만들기에 열을 올렸다는데, 박정희의 이순신 장군을 이용한 애국심 고취가 생각나서 헛웃음 지음)

 

- 샤를과 잔을 보며 유방과 한신, 선조와 이순신이 떠오름.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있지만, 권력자들에게 자신의 인기 혹은 실력을 뛰어넘는 영웅의 존재가 어떻게 느껴질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궤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 성인을 세인트로, 잔을 조앤으로 명명한 건 이미 우리 뇌리속에 깊이 박힌 '성인 잔 다르크'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닐지. 일부러 낯설게 만들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니까. 아니, 이 연극에서의 '조앤'은 우리가 아는 '잔 다르크'와는 굉장히 다른 이미지니까.

 

- 김광보 연출의 극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는데 3년만의 복귀작이었구나. 서울시극단에서 올렸던 극들도 인상깊었는데 이번 극도 아주 좋았음. 한 세기 전의 작품을 최대한 원작 그대로 살리면서 올리는게 쉽지는 않은데, 스토리와 내용은 살리면서 무대공간은 미니멀하게 만들어서 '옛날 작품'이라는 느김은 확연히 덜함. 무엇보다, 국립극단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이 극을 볼수 있었을까 싶다.

 

- 국립극단 연극이야 뭐 배우들 연기력에 대해서 굳이 논할 필요는 없을 정도. (요즘은 어느정도 믿고 볼 수 있는 극단 혹은 기획사의 공연만 본다) 조앤을 맡은 백은혜 배우의 광기 어린 연기는 세인트 조앤 그 자체였음. 정말 소녀같고 의지가 굳건하고 희망찬, 그러다가 2막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절망하기도 하는. 3시간 내내 에너지를 온 몸으로 뿜어내는 것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음. 이승주 배우의 샤를 7세는 아주 찌질...하지만 조앤과 첫 만남에서 조앤에게 신뢰를 보내는 장면이 또 그냥 찌질한 역할은 아니구나 싶어서 좋았다. 윤성원 배우는 이번 연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기자인데, 이 방대한 대사파티극을 여는 장면에서부터 후반에 스토검버로 분하는 부분까지 연기 변화가 인상적이었음. 곧 오픈하는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신지역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 독특한 인물은 또 어떻게 소화할지 아주 궁금함. 장석환 배우는 얼굴이 낯익어서 출연작들을 검색해봤는데 예전에 서울시극단 한여름밤의 꿈에서 테세우스랑 깜박거리는 나무!로 나왔었구나!! 그때도 인상적이고 귀엽다고 적어놨었네 ㅋㅋㅋ 프로그램북이 있어서 열심히 뒤져보고 찾았다. 역시 프로그램북은 일단 사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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