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강연내용 정리

[221217] 건축탐탐 '세계의 공연장 건축' 강연

eunryeong 2022. 12. 19. 22:22

    항상 새로운 카테고리의 글을 쓸 때에는 형식에 대해 조금 고민하게 된다. 이 블로그는 러프한 생각의 스케치를 남기는 공간에 가깝기 때문에, 강연 내용을 목차대로 요약해서 적지는 않을 예정. 그보다는, 강연에서 다뤄진 몇가지 이야기들 중 생각해볼만한 지점 혹은 몇가지 덧붙이는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공연장을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 아폴론은 올림푸스 12신 중 최고의 엄친아. 음악, 시, 예언, 의술, 궁술 등을 담당하는 신으로 '이성'의 영역을 상징한다.

    -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 공연의 신으로 '비이성'의 영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공연장은 최첨단 건축기술의 집합체이다. 음향설비, 좌석배치, 관객의 동선, 객석 시야, 음향구조, 외부에서의 파사드 등 다양한 요소들을 치밀하게 고려하고 배치하여야 한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비이성의 영역에 가깝다. 이러한 대립적인 요소, 모순적인 부분을 잘 풀어내어야 하는 공간이 바로 공연장이라는 장소.

 

    공연장이라는 장소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정의. 

 

 

예술이란?

    - 전통적으로 예술은 기술의 한 종류로 다루어졌다. '술(術)'이라는 글자는 예술의 내용보다는 방법적인 측면을 더 강조한 표현이기도 하다.

    - 예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이 없이도 누구나 예술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이해를 넘어서, 나만의 즐거움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 예술을 접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이미지는 실재의 단순한 반영이 아닌, 개인의 경험을 형성하는 감각과 기억의 혼합체이다.

 

    예술에 대한 이해는 각자 다를수밖에 없는 이유. 서로 감상을 나눈다는 것은, 각자의 경험과 세계를 나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공연을 보았던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대체로 정말 좋았던 공연 혹은 정말 실망했던 공연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후기가 더 궁금한 것 같아. 나랑 같은 감동을 느꼈을지, 아니면 나와 같이 실망했을지.

 

 

공연과 경계

    - 공연은 근원적으로 연기자와 관객간의 경계가 있는 장르이며, 이것이 가장 큰 특징.

    - 그러나 좋은 공연은, 공연을 보면서 '나'라는 존재가 서서히 옅어져가는, 내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 공연을 시작할 때 객석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암전을 통해, 현실의 관객이 존재하는 시간대에서 공연의 시간대로 이동하게 된다. 암전은 극과 현실의 경계를 상징한다.

 

    전통적인 연극, 그리고 공연이라면 위의 설명이 맞겠지만 요즘의 공연은 점점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듯 하다. 바로 강연을 들은 그 날 보았던 '내게 빛나는 모든 것'도 그러했고, 관객이 직접 배우들을 따라다니며 중요한 장면들을 목격하고 때론 극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노 모어 슬립'이라든가, 관객이 모린의 연설을 듣는 관중이 되어 다함께 음메-를 외치는 '렌트'라든가, 주요한 줄거리가 끝난 후 관객들과 토론을 통해 극의 마무리를 이어가는 토마스 오스마이어의 '민중의 적'이라든가(개인적으로 이 형식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굳이 저런 토론을 연극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냈어야 하는걸까? 불필요하게 장르를 섞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공연장

    - 그리스의 노천 원형극장이 서양 극장의 원형이다. 신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높은 지역까지 올라가야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대가 굉장히 낮았기에 공연이 이루어지는 동안 무대 너머 마을 경관을 훤히 볼 수 있었다. 현실과 극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공연을 보며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 로마는 공연장의 기능을 보다 유희적으로 바꾸었고, 위치 또한 도심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왔다. 이에 공연장과 다른 도시의 장소를 구분해 줄 막과 무대벽이 필요하게 되었다. 

 

    3S 정책의 원조가 여기 있었지 참.

 

 

르네상스 시대의 극장

    - 로마의 몰락 이후 1천년간 암묵적으로 공연장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로마 이후 최초의 공연장인 Teatro Olimpico 또한 과학자들의 토론을 위한 공간으로 지었으며, 이후 공연장으로도 사용된 케이스.

    - 천장에는 하늘이 그려져있는데, 초기 극장들은 야외에 있었던 그리스 극장의 전통에서 본따 하늘을 천장에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 공연장 면적에서 무대와 객석의 공간 분배를 볼 때, 무대에 충분한 공간을 배치하는 곳이 좋은 공연장에 가깝다. 이 곳은 무대 뒤쪽에 아예 길을 만들어 둘 정도로 무대 공간을 굉장히 넓게 배정한 케이스.

    - 르네상스 시대 공연장의 객석배치를 보면 반원형에서 점점 말굽형으로 객석배치가 둥글어지는데, 이는 공연을 보는 것보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보는 것이 당시 공연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는 포인트.

 

    저 시대를 다룬 영상물들을 보면 발코니에서 많은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당시에는 발코니가 굉장히 낭만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연을 많이 다니게 되면서 저 공간이 공연을 보는 데 굉장히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야가 중요하지 않은 공연, 특히 클래식 공연에서는 일부러 발코니 좌석을 예매해보곤 한다. 멋모르던 그 시절 생각했던 것이 여전히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지, 발코니에서 보는 공연은 음향이 어떻건 시야가 어떻건간에 조금 더 특별하게 보이니까. 

 

 

Street Theater

    - 그렇다면 로마 몰락 이후 1천년간 사람들은 공연을 아예 접하지 못했을까? 아니, 스테이지 웨건 형태로 유랑극단이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잠시 한 장소에서 보여주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형태는 존재했다.

 

    햄릿에서 궁정을 찾은 유랑악단도 생각나고. 첫 극장이 생기던 그 즈음이 셰익스피어의 시대라는 것도 떠오르고.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은 엄밀히 말해 '극장'이라고 하기 좀 뭐한, 그냥 연극을 할 수 있는 여인숙 정도의 작은 공간이라는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평가도 생각나고. 닉 바텀의 극단도 이렇게 작고 귀여운 극단이었겠구나 하는 재밌는 상상이 떠오르기도 하는.

 

 

드레스덴의 Semperoper

    -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인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Staatskapelle Dresden)의 공연장. 1841년 젬퍼가 최초로 지은 후, 화재로 전소된 공연장을 1878년에 재건, 2차세계대선에서 폭격으로 다시 전소된 건물을 1985년에 한번 더 재건하였다. 1985년 재건시 젬퍼의 도면에 근거하여 다시 지었다.

    - 새 것이나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자랑이 될 수 없다.

 

    헤리티지. 오늘날처럼 새로운 것이 계속 빠르게 생기는 시대에서는, 오리지날리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넘버원이 되기에는 경쟁이 치열하고 온리원이 되기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지금, 올디스트원이 될 수 있는 역사를 가진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한편, 역사를 스스로 쌓아나가지 않고 다른 역사를 사와서 헤리티지를 만들어내는 브랜드들은 개인적으로 선호하기 어려움도 밝혀둔다.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은 역사는 없으니만 못해.

 

 

Il Teatro del Mondo

    - 1979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동안 볼 수 있었던 공연장. 수로가 많은 베니스에서, 배에 실려 물 위에 떠있는 작은 공연장으로 비엔날레가 끝나는 시점까지만 공연장을 운영하는 조건으로 만들었다. 기억 속에만 남아있어야 그 기억이 계속 재생되고 생명력을 가진다는 건축가의 철학, 신념. 

    - 공연을 하는 동안 공연장이 이동하여, 공연이 끝나고 나면 전혀 다른 장소로 나오게 된다. 공연장의 비현실적인 경험을 한층 극대화시키는 도구.

    - 그러나 재밌게도, 건축가가 돌아가신 후 제노바에서 저 극장을 다시 지어버렸다. 그것도 단단한 지반의 땅 위에! 물가도 아니고 동네 가운데!!!

 

    실제로 사진을 보면 선명한 파란색의 건물이 물 위에 떠있는게 굉장히 귀엽다. 그리고 작가의 사망 후 바로 원작자의 뜻을 어기고 극장이 지어졌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이보 반 호프가 연출한 '파운틴헤드'라는 연극에서 건축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지어지지 않은 건물을 폭파시켜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건축가의 딜레마 중 하나를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저 장면을 단순히 미치광이 건축가의 일탈로만 보아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건축가는 작품을 자기 돈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돈을 지불하는 건물주와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건축가 사이에서 크고 작은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살아있을 때도 그러할진데, 하물며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작가가 사라진 다음에야 말해 무엇하랴. 다만 굳이 그 건물을 다시 지은게 베네피아의 라이벌인 제노바였다는 점이 재밌을 따름.

 

 

National Theatre, 그리고 국립극장

    - 영국 국립극단의 메인 극장 건물을 보면 공연장(무대+객석)의 공간과 공연장이 아닌 공간의 비율을 보자. 공연장과 공연을 지원하는 각종 지원시설, 리허설장소 등의 공간이 상당히 많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포이어(=로비) 공간이 상당히 넓어, 객석의 연장이자 도시 광장의 연장 기능을 하며 커뮤니티를 쉽게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 뉴욕의 링컨센터 또한 뉴욕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국립극장은 남산 중턱에 위치해 접근성이 떨어진다. 이에 더해, 2015년 리모델링을 통해 전면부의 계단이 사라져 오히려 광장과 객석간의 연결이 단절되는 느낌. 예술의 전당 또한 남부순환도로가 생활공간과 공연장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18년에 런던으로 여행을 갔을 때 템즈강 남쪽에 있는 국립극장 건물을 굳이 굳이 찾아갔다. 당시 연극은 바비칸센터에서 공연되는 맥베스 정도 외에는 딱히 보고싶은 것이 없어서, 극장 건물까지 갔지만 공연은 보지 않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시면서 책을 읽고, 노트를 정리하고, 창 밖의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던게 기억난다. 극장 안쪽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벽 전체에 가득 꽂힌 희곡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맥베스를 한권 집어온 것도 기억나고. 이러한 공간들이 모두 포이어였구나. 확실히 남산에 있는 국립극장에서의 경험과는 달랐었구나.

 

 

Elbphilharmonie

    - 엘바강 주변에 지어진 극장으로 건축비용이 무려 1조 2천억원. LG아트센터가 2천7백억원이었는데...

    - 원래 있던 벽돌창고를 허물지 않고, 구조보강을 통해 건물 상단에 공연장을 따로 올린 형태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보존된 건물을 살리면서 새로운 경험을 부여하는 형태로 지어, 신축보다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들인 건물.

    - 지면에서 공연장까지 7개 층을 한번에 관통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동하는데, 에스컬레이터 내부가 하주 하얗고 모서리가 없이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어 마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 같은 경험을 준다.

 

    다시 언급된 헤리티지. 여기서는 1조 2천억원을 들여 보존 + 재생된 벽돌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오늘날 기존에 있던 공간을 새롭게 단장하여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공연장 몇개를 지을만큼의 돈을 들여서까지 이 공간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공간이었던걸까? 아니면, 그저 오래된 건물을 살려두었다는 좋은 선례를 만들기 위해 선정된걸까? 보다 저렴하게 지었다면 그만큼의 여유자금으로 시민들의 복지에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등등. 흥미로운 사례이지만, 한국에서도 이러한 건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는 케이스.

 

0123